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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하 24:8~17
우리는 날마다 나라와 교계가 틀렸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세대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며 무엇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시니라”는 심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판결이 예루살렘에서 집행됩니다. 성전의 보물과 왕과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성경은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로잡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따라간 악한 행위를 봅니다.
여호야긴은 열여덟 살에 왕이 되어 석 달 동안 예루살렘을 다스렸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평가합니다. 그의 아버지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칼로 잘라 불에 태운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은 그 아버지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결국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여호야긴은 어머니와 신하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죽었기에 그 뒷감당을 아들이 떠안은 것처럼 보여 여호야긴이 억울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부모와 환경의 잘못에 머무르지 않고, 내가 그 길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받은 상처나 부모의 잘못된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부모와 환경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은 거기에서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넘어서, 내가 그 길을 따라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이 싫었는데 자신도 자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었는데 자기 입에서도 같은 말이 반복된다면, 말씀은 내가 따라간 악한 길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너 때문’에서 ‘나 때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에서 시작한 내 이야기가 ‘내 죄’에 도착해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이루어진 말씀을 듣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고 하니,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바벨론 왕을 통해 성전을 파괴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루어진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스기야는 병에서 나은 후 바벨론 사자들에게 왕궁의 보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 년도 더 지나 여호야긴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이 여러 번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털린 것’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집행’이었습니다.
14절에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땅에 잘난 사람은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쓰십니다. 신명기에서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면 남는 자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경고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말씀을 듣지 않아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사건이 왔을 때 하나님을 판단하기보다 말씀 앞에서 내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돌이키는 것이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로잡혔을 때 돌보심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왕과 권세 있는 자들, 용사와 기술자들이 모두 끌려가고 왕의 이름까지 바벨론 왕이 바꿉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사로잡힌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좋은 무화과’에 비유하시며, 그들을 잘 돌보시고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어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보심은 단순히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돌이킬 마음조차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로잡힌 자리에서 벗어날 날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며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해서 돌보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기에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야긴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심판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구원의 약속도 말씀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내가 따라간 악한 길을 보고, 이루어진 말씀을 듣고, 사로잡힌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것입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추석 주일, 일일 주차 30분 봉사에 나섰던 부목자님이 처음 교회 오신 한 성도와의 오해로 멱살을 잡히고 가슴에 상처를 입어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아내와 그동안 들었던 말씀, 그리고 교회의 간증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이어 초원님의 권면에 순종해 먼저 사과하며 상대가 지적하는 문제들에 거듭 사과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자, 상대 역시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며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이번 일로 부목자님은 매주 묵묵히 주차 봉사를 감당하는 성도들의 노고를 깊이 깨달았으며, 상처와 두려움을 넘어 상대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먼저 사과하고 상대를 안아준 적용은, 세속사의 갈등이 구속사로 기록되게 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의 돌보심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는 내 생각과 억울함을 붙들기보다 말씀 앞에서 내가 따라간 악한 길을 돌아보고, 이루어진 말씀을 들으며, 사로잡힌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가정과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