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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왕하 23:36~24:7
믿는 우리는 인생에서 급할 때 하나님께 “살려만 주시면 주님, 제가…”라고 약속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지난주 본문을 통해 유다가 애굽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형편에 따라 섬기다가 돌아선 여호야김과 함께 새로운 강국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는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을까요? 오늘은 우리가 말씀을 버리고 애굽을 붙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돌아서서 배반합니다.
여호야김은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되어 11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고, 애굽의 영향력 아래에서 왕권을 유지하며 조상들이 행한 죄악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자 여호야김은 삼 년 동안 바벨론을 섬겼지만, 바벨론이 퇴각하자 애굽이 이겼다고 판단하여 다시 애굽을 의지하며 바벨론을 배반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애굽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돈과 사람, 사랑과 권력, 성공과 능력, 익숙한 환경 등이 하나님 없이도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애굽입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돌이킴’ 자체보다 그 방향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께로 돌이켰지만, 여호야김은 또 다른 세상의 힘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예배와 기도,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배반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건져주신 은혜를 잊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시기마다 익숙한 육의 애굽이 있고, 훈련받아야 하는 영적 바벨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와 상황을 말씀 안에서 감당하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아도 그 식구를 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는 인생이 되고 영적인 지경도 넓어집니다.
둘째,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리치십니다.
성도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세속사가 아닌 구속사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가정의 문제를 말씀으로 해석하면 그 가정 전체가 살아납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섬기다가 애굽을 의지하여 배반하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와 아람, 모압과 암몬의 부대를 보내 유다를 치셨습니다. 겉으로는 바벨론의 공격처럼 보이지만 본문은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세상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들어도 그 손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선 배반의 자리에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일어서신 것입니다.
유다에 임한 심판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은 군대를 보내 한 방에 오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약탈 부대를 통해 밭이 뜯기고 마을이 털리듯 일상이 조금씩 뜯기는 것으로 옵니다. 내 일상이 조금씩 흔들릴 때 ‘이게 무슨 죄 때문이지?’ 하고 계산부터 하지 말고 ‘이 사건이 지금 나를 어떤 말씀 앞에 세우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은 심판이 임한 이유를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므낫세 한 사람의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백성들도 그의 꾐을 받아 함께 악을 행하며 그 길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시대부터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자신을 찌르는 말씀을 없애기 위해 선지자를 죽이고 두루마리를 불태웠습니다. 우리도 불편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공동체를 떠남으로써 말씀을 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밀어낸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켜 용서하시려고 불태워진 말씀을 다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4절)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싫어하시거나 회개한 사람에게 용서의 문을 닫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거듭 보내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끝까지 말씀을 거절한 유다에게 더 이상 심판을 철회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악의 원흉이었던 므낫세는 마지막에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애굽은 끝내 구하지 못합니다.
여호야김이 의지했던 애굽은 유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사 31:3).
오늘 우리가 하나님보다 의지하는 돈과 사람, 권력과 능력도 죄와 죽음 앞에서는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애굽이 무너졌다고 자동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도 또 다른 바벨론의 손에 붙들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자기애가 강한 한 성도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신 후 장모님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는 아내가 녹내장으로 실명되어도 잘 섬길 수 있기를 기도했지만,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분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부부 갈등으로 목장을 떠나려 했지만 막내딸의 권유로 다시 목장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여자목장에서 이 사건을 나누자 다른 성도들도 자신이 겪은 비슷한 가정의 상처를 고백했고, 아내는 수치스러움이 사라지며 다시 목장에 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와 상처를 공동체에 가지고 나와 나눌 때 죄가 힘을 잃고, 사건을 구속사로 해석하며 다시 말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돌아서서 배반하고,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리치시며, 우리가 의지하는 애굽은 끝내 우리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눈감아 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공의를 이루시고,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자백하는 자를 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찔릴 때 분노하거나 피하지 말고, 마지막이라도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