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마당에서 부르는 노래]
최대규 목사
렘 51:33~44
한 해가 결산 되는 이 시기에 여러분은 어떠한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남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왕족과 귀족, 선지자와 군인,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다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발 강가에서 흙을 파고 채찍 아래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여러 문제로 이리저리 치이며, 세상이라는 바벨론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노래입니다.
바벨론은 단순한 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가치와 힘을 상징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풍요, 안전해 보이는 성벽과 조건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가 되는 현실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포로의 삶은 이 바벨론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짓밟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막연한 포로 기간이 아니라, 이때를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심을 때와 거둘 때가 있듯이, 포로의 시간에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포로의 삶을 끝낼 수 없지만 매일매일 어떤 삶을 살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포로는 대우받는 자리가 절대 아닙니다. 무시와 조롱을 당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어떤 무시를 당해도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도 무시를 당하셨는데 '나는 왜 무시를 당하면 안되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무시 당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을 깨트리라는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상황 가운데 잘 빚어져야 합니다.
포로 생활은 무시를 잘 당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타작마당에서 우리가 불러야 하는 노래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당한 폭행과 학대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그대로 토해냅니다. 시편 137편에 그들의 거친 저주와 분노의 고백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의 저주와 탄식을 불신앙이나 반항으로 듣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해 싸우겠다”라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 좌절을 쏟아내면 우리 안에 무언가 들어갈 빈 공간이 생깁니다. 그래서 목장에서의 나눔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닙니다.
목장 조언으로 아파트를 팔아 손해를 본 어떤 부목자님이 목장에서 너무 괴롭다고 솔직하게 쏟아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라고 합니다. 목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고통이 있어도 결국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포로의 때에 드리는 기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저주에서 회개로, 원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변화됩니다. 결국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호와께 돌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한 바벨론의 평안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목장 안에서 일어나며, 선배들의 삶을 통해 확인되기에 목장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대로 될지어다’의 노래입니다.
바벨론의 성벽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안전장치였지만, 하나님은 그걸 하루아침에 돌무더기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중 삼중으로 쌓은 인맥과 학벌과 실적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루아침에 돌무더기가 될 것이니 그것은 의지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화려한 성벽, 튼튼한 성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윗의 손에 들린 작은 돌멩이 다섯 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돌무더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41절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하는데, ‘슬프다’라는 표현은 애도가 아니라 바벨론의 교만에 대한 조롱의 의미이며, 빨리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 뜻을 깨닫지 못해 바벨론은 더 교만해지고, 포로된 백성들은 그 시간을 사명으로 살지 못하고 종노릇만 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막연한 위로나 희망 고문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말씀으로, 바벨론의 멸망과 성벽의 붕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이며,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교만한 자의 끝을 보여주시는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원인과 목적, 그리고 결론이 되심을 드러냅니다.
성도는 세상 성벽을 쌓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의 성벽과 믿음의 성벽을 쌓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성지순례 중 몰타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유럽에 있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위스에서 목자로 섬기는 한 자매가 “친정엄마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받으며 감사했지만, 곧이어 목사님이 던지신 질문이 자매의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너는 형제가 믿음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겠니?”라는 질문 앞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고, 자매는 “예전에는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 오프라인으로 목장에서 “당신은 레아가 좋습니까? 라헬이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왜 꼭 두 사람 중 하나를 골라야 하나? 그냥 둘 다 짜증 난다."라고 답하였지만, 여전히 요셉이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45장 5절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찾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이 격려받아도 결국 ‘나를 위한 큰일’, 보이는 성공을 찾고 있음을 회개하게 되었다고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질문이 단지 결혼 문제를 넘어서, 배우자와 커리어와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 하나로 살 수 있겠느냐는 부르심으로 들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도 포로의 삶을 벗어나려 애쓰기보다,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리고 어떠한 상황에도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께 호소하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말씀의 성벽을 짓고 믿음의 성벽을 짓는 인생이 될 때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인생이 되게 해주실 것을 믿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