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기쁨]
최대규 부목사
시 63:1~11
2025년은 “돌이키며 살지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오늘 함께 묵상할 시편 63편은 광야 한 가운데 있는 다윗의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유다 광야로 도망쳤는데, 이 일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고, 왕의 자리를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시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즐겁게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광야의 기쁨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메마른 땅에 성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물이 하나도 없고 마르고 황폐한 땅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하며 하나님을 구합니다. 다윗은 지금 물을 찾으러 다닐 때가 아니라 은혜의 단비를 구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른 땅에는 물이 없기에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가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목이 마를 때에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맞추어 물을 마셔야 탈수 상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이 필요할 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여전한 방식의 큐티와 예배를 드릴 때 영적 탈수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따르는 가족들도 있고 수백 명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다윗은 그런 비난 속에서도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을 찾는 일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이렇게 주님을 찾았을까요? 다윗은 왕궁의 영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함께 하시는 성소가 너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마른 땅 같은 광야가 성소가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젊은 시절의 다윗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왕궁에 들어가 삶이 조금 편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는 느슨해졌고 구원의 즐거움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결국 밧세바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기억하는 다윗에게, 광야에서 다시 성소를 사모하는 일은 무엇보다 절실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전쟁터 같은 직장과 상처가 난무한 가정, 질병의 병상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성소를 세울 때 다윗처럼 광야를 기쁨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다윗은 원수에게 쫓기고 배신당한 상황에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라는 고백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어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찬양하라’는 단어는 ‘샤바흐’로 ‘요동치는 그 마음을 가라앉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찬양은 세상에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최고의 비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송축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바라크'의 복입니다.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라는 뜻이 있는데, 다윗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주님을 찬양하고 그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이 만족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만족을 못 하는 이유는 완벽주의, 열등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주의 헤세드의 사랑, 언약의 사랑때문입니다.
밧세바 사건을 통해 분수령적인 회개를 한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압살롬의 반역도 나의 죗값을 물으시고, 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에서 보면 독생자 아들을 내주신 사랑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어떤 고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광야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광야는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순간입니다.
셋째, 고통의 밤을 가득 채울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광야의 침상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읊조립니다. 우리가 생각이 많고 복잡할 때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생각하며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결국 다윗은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다고 찬양하는데, 광야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광야에 있는 침상이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보호하는 주의 그늘’이라고 고백합니다.
8절에서 말하는 ‘가까이 따른다’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듯 주님과 깊이 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이 광야에서 오직 주님만 붙들고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내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잡아 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제 개인의 큐티 경험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7년 전, 청소년부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은혜로 충만했지만, 집에 와보니 아무도 없는 집에 에어컨이 며칠째 켜져 있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참으려 했지만 분노를 못 이기고 친정에 가 있던 아내에게 전화와 카톡 메시지로 혈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큐티 말씀인 사무엘하 19장에서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승리보다 ‘구원받지 못한 아들 압살롬, 한 영혼’에 대해 더 애통해하며 울었습니다. 그 본문을 보며 순간 수련회장에서 제 방의 시원함을 유지하려고 계속 에어컨을 켜놨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 것은 그렇게 아끼지만 내 것에는 관심이 없구나!’ 하시며 슬퍼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게 끝까지 압살롬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메마른 광야에 계십니까? 주의 성소를 잘 세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힘든 밤을 보내는 분들이 있다면 그 밤을 걱정으로 채우기보다, 말씀을 읊조리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머무는 밤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올 한 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울고 웃었는지 돌아보며 2026년에는 우리가 모두 구원 때문에 울고 웃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