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김현우 목사
행 21:15~26
안녕하세요. 혼외자로 태어나 무서운 피해 의식으로 죽었다가 구속사로 살아난 김현우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제목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인데, 소수의 형제가 동역자들과 함께 온 사도 바울을 기꺼이 영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원수였던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영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꺼이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째, 여러 날을 기다려주며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러 날 후에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는데, 결박당할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울면서 막으려 했던 동료들을 양육하고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절을 원어로 보면 '우리가'라는 주어가 숨어 있는데, 우리는 사명의 길을 혼자 갈 수 없기에 함께하는 ‘우리’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영적 진실성의 결론인 인내로 ‘우리’가 되기까지 ‘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인내로 기다리며 여행 짐을 싼 바울의 일행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와 오랜 제자인 나손을 데리고 함께 갑니다.
우리 교회는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겸손한 환경에 있는 분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와 구브로 사람 나손 같은 겸손한 환경이 있는 성도님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장차 올 환난의 복음을 듣고도 함께 하는 ‘우리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향해 함께하는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기꺼이’는 아주 기쁘게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영접했다는 것인데, 자격 없는 나를 기꺼이 영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바울을 기꺼이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을 16절에서는 ‘제자’라고 하고, 17절에서 바울을 영접한 사람들은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함께 고난을 감수하는 동료는 '제자'라고 하고, 사명의 자리인 예루살렘에서 기꺼이 영접하는 자는 '형제'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고난이 예정된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는 제자가 되어,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기꺼이 영접하는 형제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우리’가 된 바울의 일행은 다음 날 야고보에게로 들어갑니다. 먼 길을 여행한 바울은 쉬지 않고 이튿날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 함께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여러 날’을 기다렸지만, 이미 도착한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는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당회에 '우리가' 함께 들어갑니다.
둘째, 말만이 아니라 손과 발이 가며 손해 보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당회에 들어간 바울은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이방 가운데에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의 선교 보고를 딱 한 문장,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요약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해도 은근히 내가 했다는 생색을 낼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하신 구속사가 아니라 내가 했다는 세속사가 섞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험난한 산지와 바다를 건너고 유대인들에게 핍박받았지만, 자신이 섬긴 것을 통해 하나님이 하셨다는 일관된 내용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예루살렘 당회는 이렇게 은혜로운 선교 보고를 받았지만, 예루살렘의 힘든 실정을 알려주며 예수님을 믿는 수만 명의 유대인이 율법에 대한 열성 때문에 바울에 대한 깊은 오해가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에게 나실인 서약을 한 네 명을 데리고 직접 성전에 들어가는 손과 발이 가는 수고와 제사 비용까지 내는 손해 보는 적용을 하도록 처방합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구원을 위해서 손해 보는 적용을 할 때,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의 죄를 항상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수고에도 예루살렘 당회는 여전히 이방인 교회들과 형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편견과 가치관을 꺾기가 힘듭니다. 그러니 자기 죄를 보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표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공회에 참석하고 나서 한 마디 토를 달거나 반박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네 사람의 결례를 위한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예루살렘 당회의 질서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은 바로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죄패가 있는 도시입니다. 내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위한 적용과 순종을 곧바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패가 확실해야 생색 없이 섬길 수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낳고 남편이 자살하여 과부가 되셨고, 딸까지 익사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식당을 하시다 유부남을 만나 저를 낳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호적에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혼외자입니다. 그래도 평생을 착한 아들로 자랐는데, 성인이 된 후에 어머니에게 지랄 총량이 터졌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바울의 예루살렘 같은 분이십니다.
이번 주에 청소년부 촬영이 있어서 아침부터 경기도 양주에 갔었는데,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본 적도 없는 오촌 누님의 장례를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먼 거리였고 주일 설교도 해야 하고 밀린 일들도 많이 있어서 고민이 되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하시는 어머니를 위한 적용으로 찾아갔습니다. 장례식장에 아는 분이 단 한 분도 없어서 당황했고, 심지어 그날은 우리 집에서 목장을 섬기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촉박한 일정에서 생색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3년 전만 해도 어머니를 원망하며 어머니께 수없이 돌을 던지던 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만나주시고 구속사의 말씀으로 살려주셔서 앞치마를 두르는 적용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죄가 보여서 구원을 위해 적용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고 표적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구하며 가족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며 결국에는 나와 내 가족의 구원을 이루어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