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일 - 용서]
Jul Medenblik 목사(칼빈신학교)
마 18:21~35
안녕하세요! 저는 150년 역사를 가진 미국 칼빈신학대학 총장 Jul Medenblink 목사입니다. 우리 학교는 한국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배출하며 한국 교회 성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습니다.
얼마 전, 김양재 목사님께서 저희 채플 강단에서 여성 목사님으로서 최초로 영어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설교는 온라인을 통해 8,000명 이상에게 전달될 만큼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을 섬기는 것이 저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 여인이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테드’였는데, 대단히 강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딸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함부로 대했다. 용서해다오.” 그녀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잘 아는 이유는, 바로 그 옆방에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밖에 서 있던 여인은 저의 어머니, 그리고 안에서 임종을 맞으신 분은 외할아버지였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처럼 깨어진 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눈물과 절망, 분노와 상처를 보면서,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누구를 떠올리고 계십니까? 부모님입니까? 자녀입니까? 아니면 직장 동료나 가까운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이 ‘용서’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겸손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가르치신 후, 베드로가 나아와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아마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떠나려는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의 어마어마한 은혜와 인색함의 위험을 설명하십니다. 한 종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라는, 평생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나가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이라는 푼돈을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주인이 분노하여 그 종에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십니까?
산상수훈에서는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하셨고,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용서에 진지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용서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그 탕감을 받았는지 아느냐. 이 은혜를 받았다면 너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쓴 뿌리나 미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며, 이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용서하느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척도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 단둘이 식당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너무 어릴 때 낳아 기르며 너무 많은 실수를 했다. 충분히 격려하기보다는 엄하게만 대해서 너를 많이 실망시켰다. 나를 좀 용서해다오.” 저는 아버님에 대해 불평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에게 용서를 구하시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용서해 드리고, 저 역시 아들로서의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저는 그날 저희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와 나눈 그 대화는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문밖에 어머니처럼 서성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용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용서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2-13)
우리는 모두 용서라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돌아오는 주간에 여러분은 후회와 쓴 뿌리를 가득 찬 옷을 입고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입고 용서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옷을 입고 오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의 짐과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죄의 용서를 주님으로부터 받으셨습니까?" 둘째로는 "그렇다면 용서받으신 여러분들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베드로가 갈등 관계에 있던 친구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먼저 용서하시고 다시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용서를 실천하는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실재적으로 용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부족함을 하나님께 고백합시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