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21-3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 복음으로 인한 소동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찾아오는 어떤 소동 앞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사명 감당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소동에도 사명을 감당하려면 첫째, 구원을 위해 나아가는 작은 적용을 해야 합니다.
21절에 ‘이 일이 있은 후에’라고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강론하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은 5만으로 계산되는 마술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열심을 낸 결과가 대단하면 그것을 자랑하며 안주하고 싶지요.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사역의 결과에 안주하지 않고 아직 남은 사명을 위해 나아갑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삶으로 보여 주고 있어요.
이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한 영적 제자이고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남아서 끝까지 사역한 동역자잖아요. 이렇게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다는 것은 반드시 마게도냐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이 목적이 되는 큰일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보내는 것처럼 작은 적용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구원을 위해서 작은 일부터 해왔지요. 13년 동안 저희 집을 오픈하고 13개 큐티 모임을 한 것에서 시작한 말씀 묵상 운동이 예루살렘과 로마라는 세계를 향해 강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일이 아무리 커 보여도, 작지만 구체적인 적용을 통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인생의 목적이 내 열심으로 이룬 결과를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인정하나요?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구체적이고 작은 적용은 무엇인가요?
복음으로 인한 소동에도 사명을 감당하려면 둘째, 예수님이 전해졌기에 갈등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23절에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고 합니다. 이 도는 복음을 가리키지요.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복음을 전했기에 온 성이 평안하고 조용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예수님이 바르게 전해진 곳에는 소동과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세상 문화와 가치관이 이제는 불편해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바로 이 소동의 중심에는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적지 않은 소동의 중심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신상 모형을 만드는 일이 그에게 적지 않은 벌이였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보니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놓고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며 ‘손으로 만든 우상은 신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격동시키지요.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자신들의 생업에 위협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소아시아 사람들은 명절마다 에베소에 와서 개인마다 새로 나온 신상을 사서 마치 우리가 큐티하는 것처럼 묵상했다고 해요. 그런 문화가 있었으니 우상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은 명절마다 대목이었지요. 하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우상을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줄어들었어요. 모든 것의 끝에는 돈이 있는 것처럼 복음으로 인한 소동의 중심에도 돈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래요. 예수를 믿어도 우리 마음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적지 않은 물질 때문임을 알아야 해요. 성공하기 위해서 악해지고 성공하고 나면 음란으로 치닫는 우리이기에 겸손한 사람은 없고 겸손한 환경만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풍족한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며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이죠.
저도 데메드리오 같았어요. 외제차를 타고 나타난 남편과 결혼하면 풍족한 생활을 할 줄 알았기에 결혼을 결정한 것이죠. 하지만 제 마음대로 돈을 쓸 수도 없고 평생을 연습해 온 피아노도 칠 수 없었어요. 그런 겸손한 환경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피아노 강사라는 풍족한 생활을 내려놓고 복음을 전하는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안에서 일어난 적지 않은 소동은 무엇입니까? 풍족한 생활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내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친구들과 남자친구를 우상으로 삼은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길 원한다는 한 고등학생의 청소년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제가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의 문제로 한 친구가 전학을 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 후 저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른 친구들 보기에 좋은 행동을 하려고 애썼죠.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지키려고 애쓰다 보니 뒷전이 되었죠. 중학생 때까지는 공부도 친구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는 듯했어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늘 두려웠어요. 결국 공황 증세로 몸과 마음이 아픈 상태에서 청소년부 연합 수련회에 참석했어요. 거기서 은혜를 받고서 ‘하나님이 제게 적용하라고 하시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순종할게요’라고 기도했는데 이틀 뒤 남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힘들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다시 남자친구를 붙잡았어요. 그 결과 일상은 엉망이 되었고 교제도 후회스럽게 끝나고 말았어요. 24절, 25절 말씀에서 에베소의 은세공업자 데메드리오가 우상을 만들어 팔아 이익을 남기는 데 방해가 되는 바울을 잡으려고 소동을 벌였듯이 저 역시 하나님이 아닌 남자친구를 우상으로 삼으며 즐거움을 취하려고 했음을 깨달았어요.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제 죄를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100% 옳으신 일임을 믿고 이제는 하나님을 제 중심에 모시길 기도해요. 저의 적용은 ‘전 남자친구가 생각나서 외롭고 슬플 때 큐티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시기를 보내며 모든 일을 교회 공동체에서 먼저 나누며 잘 묻겠습니다.’입니다.”
소동을 일으키는 데메드리오는 돈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교양과 성품으로 포장합니다. 데메드리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28절에 보니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29절에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고 해요.
이에 바울이 그들을 구하고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려 하지만 제자들과 관리들이 만류합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는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적용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생각을 꺾고 백성 가운데로 가지 않았어요. 이렇게 내 생각을 꺾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나를 죽이는 것이 소동을 멈추게 하는 비결입니다. 내 안과 밖에 일어나는 어떤 소동에도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내 생각을 꺾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사명의 로마로 나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내가 이룬 것들과 과거에 얽매어 안주하고자 하는 저희입니다.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씩이라도 내딛는 작은 적용을 함으로 나도 살고 우리 가정도 사는 은혜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적지 않은 벌이와 풍족한 생활을 꿈꾸기에 복음 앞에서 매일 소동하는 저희의 욕심을 주님 앞에 회개하며 내려놓습니다. 나의 교양과 성품으로 명분을 내세우며 주위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데메드리오가 나 자신임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분별하는 십자가의 지혜로 하루를 살며 구원을 이루어 가는 저희가 되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