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보시기에]
왕하 3:1~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고난 가운데 기회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는 찾아온 기회를 져버려서 더 큰 위기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회를 져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 보시기에를 생각하며 큐티 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와 보시기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보시기에 앞뒤가 다른 개혁은 악한 것입니다.
여호람은 그의 형 아하시야보다 십 년 더 나라를 다스렸지만, 성경의 평가는 둘 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아합이 만든 궁정 바로 앞의 기둥 우상인 바알의 주상을 없앴는데, 이것 때문에 성경은 그가 부모처럼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에서 쓰인 동사는 사역형으로 주상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냥 옮긴 정도였습니다. 여호람은 척결할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본문 3절에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따라 행했다는 다베크라는 단어로 그 뜻은 집착하다, 고수하다로 딱 달라붙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여호람은 앞에서는 개혁했지만, 뒤로는 돈과 권력에 딱 붙어서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남유다는 이스라엘과 똑같이 연약했지만, 회개한 왕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 되었기에 누가 회개를 잘하나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못하니 말씀을 봐야 합니다.
둘째, 뇌물을 준 자, 받은 자가 똑같이 악합니다.
여호람이 여로보암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는 죄가 있으니, 모압이 쳐들어오고 배반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모압은 다윗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믿는 자인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강력한 아합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모압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며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하나 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모압의 배반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악에서 떠나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어떤 사건이 오면 그 사람을 욕하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회개는 하지 않고, 반란 진압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고자 온 이스라엘을 둘러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단어 파카드로 방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열심으로 우리 모두를 매 순간 VIP로 대하시며 파카드 방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찾아와 내게 말씀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주인공이고 나는 피해자 조연이고 감독이신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주제가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이 생각을 끊어내야 합니다. 배반당하는 사건을 통해 내가 주님을 배반했던 일을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뇌물로 준 모압의 메사나 모압의 배반에 복수로 대응한 여호람이나 다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한 자입니다.
셋째, 여호와께 묻지 않으면 악한 자입니다.
여호람이 직접 다니며 군대를 소집했는데도 수가 모자라니, 사돈인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모압 정벌에 함께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와 함께 가시겠느냐?'고 물으며 일인칭 대명사 접미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국가적인 차원의 전쟁이 아니라 모압왕 메사에 대한 여호람 개인의 복수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전쟁의 동기가 악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고민조차 안 하고 우리는 하나이니까 당연히 함께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람이 '어느 길로 올라가냐?'고 여호사밧에게 질문하였는데, 이는 그저 형식에 불과한 질문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을 압도하는 아합 앞에서는 하나님한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했지만, 손아랫사람인 여호람 앞에서는 우쭐해져 하나님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복수심에 한 사람은 우쭐함에 도취되어서 둘 다 묻지를 않으니, 결국 구원의 기회를 놓칩니다. 그래도 우쭐한 것보다 눌리는 것이 구원받기 좋은 환경입니다. 사건이 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데 평소에 말씀을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 생각이 안 나고 내 감정만 생각하고 똥파리에게 물어보고 불신자 정신과 의사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잘 묻는 공동체에 딱 붙어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묻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묻는 것이고 말씀에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련하고 연약한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공동체 고백은 지난주에 있었던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혼 위기에 있는 10년 차 목원 집사님께서 최근 남편을 만나 훼파된 가정을 중수할 것인지, 함께 믿음 생활을 할 것인지 물었는데, 남편은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이혼을 요구했고, 집사님도 이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남편은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집사님이 남편을 보면서 내 모습이 저 남편 속에 있구나!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공동체 고백은 하버드에서 석사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 들어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 집사님이 힘든 결혼 생활 때문에 1년 휴직계를 내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우리들교회를 소개받고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직 여부를 두고 평생이 보장되는 직장을 포기하고 공동체에 남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이 결정이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결정이라고 믿습니다.
세 번째 공동체 고백은 본인이 바람을 피워 창피해서 이혼하고 공동체를 떠나려고 했는데, 아들이 교회에서 보는 사람마다 '우리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며 떠들고 다녀서 너무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그 말이 '우리 집 살려주세요.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하며 외친 것이라는 목자님의 해석을 듣고 분수령 적인 회개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인생은 늘 한계가 있지만, 한계를 넘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배반당했을 때 앞뒤가 다른 내 모습을 회개하고 공동체 안에서 물으며 구원으로 인도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