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산의 통로]
마 5:7
우리가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게 되어 영적 배부름을 경험하게 되면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긍휼이 생깁니다. 긍휼은 주님이 올라가시면 따라 올라가고 내려오면 함께 내려오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합니다. 오늘은 팔복산의 통로인 다섯 번째 복인 긍휼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은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아파할 만큼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만, 인간 자체를 아무 차별 없이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박애나 사람의 동정이 아닙니다. 긍휼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긍휼은 동정이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못한 여러 가지 조건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긍휼히 아닙니다. 뭔가 좋은 일에 기부하거나 동정을 베풀었다가 혹시라도 나에게 있던 것이 없어지거나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돕고 베풀었던 일들에 대해 생색이 생깁니다. 또한 동정은 예전에 자신의 선함을 기억하고 억울해합니다.
(2) 긍휼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긍휼을 남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때 내 마음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해서는 안 될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측은지심이 생기지만, 고통당해 마땅한 사람이 당할 때는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의 상식, 윤리의 기준에서 긍휼은 조건적이고 차별적입니다.
(3) 주님의 긍휼은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자격이나 조건을 붙이지 않고, 누구든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밑동 잘린 나무처럼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두려움을 경험하면 장차 임할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 고난이 없는 사람은 죽음을 예비할 기회 없이 죽음을 맞이하기에 고난이 많은 사람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입니다.
둘째,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분은 구원의 반석에 오른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은 무너진 내 가정과 인생을 보고 계시고, 우리를 주님의 태에서 나온 자식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아무리 형편없어도 하나님 손바닥에 새기시어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주시고 헤세드를 베푸셔서 나의 주홍 같은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말합니다. 나에겐 긍휼히 여김 받을 자격과 공로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었기에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우리의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는 자녀 우상입니다. 북이스라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하나님은 멸망을 앞둔 북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호세아 가정을 통로로 쓰셨습니다. 내 식구들의 불순종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행음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흩으시고 폐하시며 사함받지 못할 멸망의 자식을 주어서라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호세아는 먼저 긍휼히 여김 받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평강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먼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 그 애통함을 가지고 목장에서 공감해주시고 손과 발이 가는 행함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공동체 나눔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부르시는 열왕기상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두 집 살림하며 내연녀와 저녁을 먹으러 가고 있었는데 아내가 뒤에서 '여보!' 라고 부른 말이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부르신 것처럼 깨달아졌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말씀이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것인 줄 믿습니다.
셋째,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라!를 넘어 사랑하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피해 의식은 가정, 지역, 나라 별로 없어지기 힘든 일인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23세에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교수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표현하며 더 이상 피해자로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고로 얻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해서 저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난을 통해 내 죄악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 구원이 너무 크고 중요함을 알게 되어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 같은 그 사람도 구원의 자리로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떤 이유든 눈 뜨면 말씀 묵상하고 순종하는 경건이 범사에 유익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덕분에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복의 통로입니다. 내가 얼마나 긍휼히 필요한가를 아는 사람만이 긍휼히 여기며 힘든 사람과 같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애통으로 우리를 공감 하시며 헤세드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대단한 신분이 되었기에 힘든 사람에게 나의 긍휼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창자가 끊어지듯 기도하며 힘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