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자리]
최대규 부목사
마 23:1~12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이중적이고 외식하는 내로남불의 특징을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바리새인이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은 모세의 자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모세의 자리는 말과 행함이 달라서 짐을 지우는 자리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를 말하는데 얼마나 경건한지 율법을 필사하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하고 와서 다시 쓰고,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새로운 펜으로 필사했다고 합니다. 바리새파는 거룩을 위한 자발적 율법 준수를 위한 모임으로 시작되어 그 뜻은 구별된 자입니다. 그런데 점점 변질되어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모세의 자리만 탐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당시 회당에 돌로 만들어진 자리로서 그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리였는데, 자기 이름을 지워서라도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애통하는 모세의 모습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 때문에 누군가에게 고난, 상처, 아픔, 저주의 짐을 지워주어 결국 비틀거려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께로 나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힘들게 지켜왔던 것 때문에 예수님이 가려졌습니다.
탈무드에 바리새인의 일곱 가지 유형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어깨형 바리새인
자신의 선행을 어깨에 걸쳐 모든 사람이 보게 만듭니다.
(2) 조금만 기다려줘 형 바리새인
선행할 기회를 자꾸 미루면서 늘 변명거리를 찾습니다.
(3) 멍든 바리새인
여자들을 곁눈질하지 않으려고 한쪽 눈을 감고 다니다가 벽에 부딪혀서 멍이 든 사람입니다.
(4) 곱추형 바리새인
언제나 늘 곱절로 구부리고 다니면서 거짓 겸손을 부린다는 겁니다.
(5) 심사숙고형 바리새인
자신의 선행횟수를 꼼꼼히 셈합니다. 다 기록해두고 잊지 않는 겁니다.
(6) 두려움형 바리새인
하나님이 자기에게 진노하실까 봐 늘 노심초사합니다.
(7) 하나님 사랑형 바리새인
믿음으로 선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저의 바리새인 같은 모습 때문에 한 성도님께 큰 짐을 지워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큰아들을 잃고 아픔과 상실감으로 인해 비로소 말씀이 들리게 되셨다는 집사님의 작은 아들 심방을 위해 병원을 방문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집사님에게 큰아들의 사건이 있어야 할 사건이고, 잘 해석하시며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사춘기 딸의 자해 사건을 겪으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때가 떠오르면서 제가 위선적이었고 그 집사님께 마음에 큰 짐을 지워 드렸구나! 생각되어 죄송스럽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앉히시는 자리와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같아지는 곳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해서 마치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 했습니다. 또한 잔치에 가면 항상 상석에 앉고 회당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으며 랍비라고 불려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실상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스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점점 비슷해지는 것이 축복인데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자리만 찾아다니면 결국은 그 자리 때문에 망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난 2월에 4년 만에 열린 청소년부 현장 수련회는 하나님이 아이들을 꿇어앉히신 자리였습니다. 예배를 무려 여섯 시간이나 드렸으니 아이들에게는 너무 불편한 자리였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앉히신 자리에 있던 아이들이 용서할 수 없던 아버지를 용서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진솔한 고백을 하였는데, 부모님이 지워준 아픔, 상처, 저주, 그리고 죄와 중독의 짐들이 벗어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셋째,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한 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생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치고 정죄할 자격이 없기에 바리새인들처럼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랍비라는 직책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의식과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싶은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것보다 내가 누구를 부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불려지는 것에 심취해 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려지는 것조차 부끄러운 창녀, 세리, 각색 병든 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저를 목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牧師)라는 한자어 뜻처럼 내가 누군가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누군가의 아픔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냥 저를 님으로 불러주는 호칭에 교만해졌습니다. 제가 잠깐 사역을 쉬며 몸 쓰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목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첫 질문을 받은 후부터 목사로 불렸고 나중엔 최 씨라고 불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토피로 아파 늘 대접만 받고 자랐던 저는 이 정도 무시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당시 집 앞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주님은 저를 목사라고 부르시지 않고 사랑하는 아들 대규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나를 불러주시는 것 자체가 값진 것임을 깨닫고 눈물이 났습니다. 제게 허락하신 고난도 약재료도 보잘것없지만 제가 부를 이름 주님이 있기 때문에 제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불러주는 이름이 없다고 할지라도 부를 수 있는 주님의 이름이 있다면 그 길을 가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힘들고 아픈 문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자유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불려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축복임을 깨달아 주님이 부르시는 자리에 앉으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