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산에 갑시다]
마 5:1~4
우리들교회는 새해에 '팔복 받으세요!'로 인사를 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팔복 설교가 행해진 곳은 디베랴 서쪽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하틴산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이곳은 팔복산으로 불리며 산 정상에는 팔복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 팔복산으로 올라가 팔복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함께 듣기 원합니다.
첫째, 제자가 돼야 합니다.
4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주님은 병 낫기만 바라는 무리의 상태 정확히 아시고 그들을 떠나 언덕으로 오르십니다. 제자들은 부르심 받은 은혜를 알았기에 머물고 싶은 수많은 무리를 떠나 주님 한 분을 쫓아 산에 올라갑니다. 내리막길이 아닌 가기 힘든 오르막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복 중 가장 큰 복이 말씀이 들리는 복인데, 말씀이신 예수님께 올라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편하고 좋은 자리를 떠나 예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제자로서 내디뎌야 할 첫걸음입니다. 그렇게 나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이는 미완료 상태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계속 팔복의 말씀을 강조하셨다는 뜻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사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의 핵심이자 혁명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모세 시대에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제자들은 아무런 격이 없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문턱이 낮아져 영육 간에 아주 친근한 복음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팔복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 가난한 자가 가는 곳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십니다. 원문에는 복이 있는 사람은 가난한 자이다. 심령에서로 쓰여있는데, 심령이 맨 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강조점이 심령에 있지 않고 가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과 가난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모순이고 오류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제자들의 마음과 가슴에 지진이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이유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이,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며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놓는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팔복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가야 할 구원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방향을 말해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전적 빈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부르짖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겸손 자체가 하나님을 왕으로 경외하며 그 통치를 받기에 천국을 이미 소유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야말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기에 축복입니다.
잠깐 행복한 줄 알았다가 죽음과 함께 사라질 부자로 사시겠습니까? 잠깐 가난하지만 영생을 누릴 진짜 복 있는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부자인 상태로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택한 자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육이 무너지는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셋째, 애통한 자가 돼야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애통을 착각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심복 군대장관 요압은 '아니 왕을 반역한 자 압살롬은 그렇게 사랑해서 울고, 왕을 위해 충성한 자들은 이렇게 미워할 수가 있어요?'라고 합니다. 구원을 모르면 이처럼 이해가 안 됩니다. 내가 복 있는지 없는지는 애통이 있는지 없는지로 알 수 있는데, 가난하고 병에 걸리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원통입니다. 애통은 인간적인 아픔, 슬픔이 아니라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 죄를 보아야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생깁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나에게 애통을 가르쳐 주는 최고의 공로자인데, 그 사람을 통해 나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이런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끈질긴 죄성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죄성을 깨뜨리기 위해 얍복 나루에서 그의 원수가 되어 씨름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했다라는 의미보다는 야곱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 를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내 원수는 에서도 삼촌 라반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죄성 즉, 나의 타락한 본성과 깨어지지 않는 자아, 교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맨날 고쳐주세요. 낫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내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상대방의 악함은 나의 악함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나 자신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 또 나를 애통하게 하는 사람 때문에 애통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그것이 복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애통하면 하나님이 안아주십니다.내 죄로 인해 애통이 크면 위로도 크고 애통이 얄팍하면 위로도 얄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너무 애통할 일이 많은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집사님은 박사이고 경영학 교수 9년차입니다. 이 분이 결혼정보회사 [노블리스 클럽]에 가입해 사자 들어간 사람을 포함해서 백여명을 만났는데, 결혼은 4년제 대학 나와 중소기업 다니는 평범한 남자와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알고 보니 거짓 학벌에 거짓 연봉에 거짓 재력이 다 드러나서 별거하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산다 안 산다 난리가 났지만 결국 우리들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들이 아빠를 너무나 좋아하는 겁니다. 아내 분이 최근에 10분 정도 되는 저의 큐티노트를 날마다 듣다가 내가 너무 남편을 격렬하게 무시했구나! 남편도 힘들었겠구나! 깨달아져서 남편에게 사과했고 그 후부터 신기하게 정말 미움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박사인 아내도 이렇게 자기 죄를 보니까 가정을 지키는 겁니다. 이게 팔복산에 가는 비결입니다.
교회에 나와 가정을 지켜가는 것이 팔복산에 갑시다 하는 초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나누고 말씀에 힘입어 내 죄를 공동체에 고백하며 함께 애통하고, 나 자신 때문에 애통한다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파라칼레오 하시는 성령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