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공의]
행28:3~6
영원한 피난처에는 공의가 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판결되는 판결이 공명정대하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100% 죄인이기 때문에 100% 옳을 수가 없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무엇이 공의일까요? 최고의 공의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성령의 공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뜨거움으로 독사가 나와야 합니다.
특별한 동정으로 피워진 불이 비와 추위로 꺼져갔습니다. 바울이 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손수 나무 묶음을 거두어 불을 지피려고 했는데 그만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너무 무서운 상황이 쓰나미처럼 우리에게 몰려옵니다. 그냥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몰려옵니다. 가족 전도를 위해, 남편을 위해, 자녀를 위해, 아내를 위해 불을 피우고 밥해주는 적용을 했지만 숨어있던 독이 섞인 말과 눈빛에 물린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숨어있던 독사가 나옵니다. 이렇게 실체가 드러나면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합니까? 독사가 문 채로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감각이 둔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물린 채로 상대방의 독이 섞인 말들을 다 받아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 받아내는 것이 성령의 공의입니다. 서로 독사 같은 것으로 상처를 주는데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받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진실로 살인한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독사가 얼마나 맹독성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독사를 떼어주거나 응급처치해주거나 걱정해주거나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진실로 살인한 자로다!라며 손가락질합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살인범이라고 생각하며 공의의 디케의 여신이 그를 죽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공의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사람들은 과거의 죄가 한 가지라도 있으면 삶 전체를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18장을 보면 과거의 죄와 오늘의 죄를 같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이 오늘의 심판의 근거입니다. 내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오늘 내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인정하면 즉시 내 죄가 다 도말 됩니다.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는 천국 백성이 됩니다. 사람은 공의롭지도 공평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만이 공의롭습니다. 독사가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매달려 있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고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주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주님이 나무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독사에 물려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있는 독사로 그저 존재 자체가 가해자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믿기 전에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히 볼 수 있고 어떠한 죄인인지를 아는 정확한 자기 인식에서 성령의 공의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과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런 바울이 유대인, 로마인, 뱃사람, 이방인 중에서도 야만인으로 여겨지던 원주민에게까지 살인자라는 말을 들으니 저라면 변명을 했을 것 같습니다. 때마다 바울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살인자였음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받을 벌을 받으면 됩니다. 존재 자체가 가해자이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물고 있는 것을 가만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피해자 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가해자, 살인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돌이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합니다.
상대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독사는 받아줄 수 있지만 그 독사의 권세, 짐승의 권세는 떨어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권세, 세력들을 특별한 동정으로 피우고 있던 그 불에 떨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독사에 물렸다고 불에 떨어버려야지 그 불을 꺼뜨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흘렸던 눈물, 헌신, 그리고 말씀으로 목숨 걸고 결단했던 적용들, 바로 그 불에 이 짐승의 권세가 불살라집니다. 내가 구원을 위해 불을 피우고 내가 어떠한 자인지 늘 십자가 앞에서 인정하고 간다면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독이 섞인 말들도 나의 존귀함을 손상하거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가치를 폄하시킬 수가 없습니다. 내가 구원과 사명이라는 십자가를 길로 놓고 간다면 조금도 상함이 없습니다.
바울보고 살인자라고 했던 그 원주민들, 그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바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래 기다리면서 죽는지 안 죽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나를 특별한 동정으로 대접해주었어도 사람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 옆에 악한 사람이 있다면 나를 바울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독사에게 물릴 때 야단법석을 치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내 모습을 인정하고 불을 피운다면 나를 살인자라고 무시하던 자들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공의입니다. 내 열심으로 살았을 때는 살인자였지만 돌이켜 말씀 앞에 나를 직면하고 회개함으로 전혀 새로운 존재,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창조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태어난 전혀 새로운 존재로 나를 빚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손가락질받던 바울을 보고 원주민들이 신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이 아닌데 이렇게 말한 건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적용을 길로 놓으면 너무 놀라서 '예수가 있긴 있나 보네?' 그러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공의입니다.
공동체 고백은 다섯 번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아버지를 둔 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분이지만, 저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때문에 명절에 아버지를 찾아뵈었다가 험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권면으로 아버지께 영접 기도를 권면했고 놀랍게도 울면서 기도하시는 기적이 일어나 지금은 공동체에 붙어가고 계신다고 합니다. 엘리트이신 분들이 착하고 교양있는 얼굴로 안 믿어진다고 하는데, 다섯 번 결혼과 이혼을 겪으신 이분이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나고 갈 때까지는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지만, 예수 인도하셨네! 고백만 있으면 성령의 공의를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