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항해]
행 27:1~8
바울이 긴 재판 시간을 끝내고 항해를 떠나게 되는데 오늘은 바울이 떠나는 성령의 항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항해는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다메섹에 갈 때는 자신이 결정하고 계획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난 후로는 내가 계획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획한 것에 끌려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는 지금 로마로 가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죄수로 타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죄인인지 아는 사람만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내 인생이라는 배에 선장이 아니라 죄인으로 탈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배에 탄 죄수로 죄인 됨을 늘 간증하고, 사명 따라 그분이 작정하신 대로 로마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항해입니다.
성령의 항해는 말씀이 앞장서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는 말씀이 바울을 먼저 이끌었습니다. 하루하루 주신 말씀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하고 전하며 늘 증언하며 공동체에 물으며 가다 보면, 결국은 로마에 가서도 증언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의 항해는 함께 배에 탄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에 죄수의 신분으로 가지만 홀로 가는 게 아닙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함께 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바울 곁에는 누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친구들이라고 표현된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지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섬김을 특별한 섬김을 베푼 특별한 친구라는 뜻의 단어로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겨주며 생색 없이 베푼 대접 때문에 바울은 큰 위로와 격려를 받고 로마까지 갈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우리에는 높은 직책의 백부장 율리오도 있었는데, 바울은 그 때문에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서 세상에서 도움을 주는 율리오 같은 사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는데 그들은 바로 죄수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인이 아닌 식민지의 사형수로 죽음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유흥거리로 사자 밥이 되어 죽을 이 죄수들은 살아갈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으며, 이 항해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는 죄수, 결국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웃음거리로 사자 밥이 되어야 하는 그들에게 함께하는 우리가 되라고 하나님께서는 배에 태우신 것입니다. 로마로 항해하는 여정 속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성령의 항해입니다. 내 옆의 죄수들을 다 제쳐 놓고 다른 로마로 가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셋째, 성령의 항해는 역풍으로 참 목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 위해서 아드라뭇데노까지 가는 배를 탔는데, 역풍이 불어서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미항까지 갔습니다. 아드라뭇데노는 에베소 위쪽에 있는 항구도시 이름입니다. 바울이 항구마다 들리는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것인데 아드라뭇데노에 다다르면 또다시 반대로 지역 항구들을 들르면서 내려와야 합니다. 아드라뭇데노는 죽음의 공해(公海)라는 뜻으로 추억에 젖어 기억 속에 갇혀 반복되는 생각과 감정들을 말합니다. 성령의 항해를 하려면 그 완행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내 과거의 상처, 아픔, 영광, 슬픔과 작별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었어도 그런 바울을 보고 '이 살인자야!!'하며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늘 과거 상처와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이 겸손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겸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그럴 때마다 그 완행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 배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죽음의 공해가 종착점이 됩니다. 배에서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덮어놓고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쳐 왔던 모든 세월이 나를 로마로 보내 사명을 감당하고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었구나!'하며 모든 시간이 구속사로 해석돼야만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배에서 내려 내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그때 내 과거의 아픔과 상처, 얽히고설킨 감정들과 작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과거의 배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무라에서 역풍을 허락하십니다. 내가 못 하니까 율리오를 통해 알렉산드리아행 배에 다시 오르게도 하십니다. 이렇게 내가 작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작정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죄만 보고 배에 타고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배를 옮겨 타도 여전히 힘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의 공해에서 내려서 사명의 배를 타고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으로 목적지가 달라졌어도, 여전히 결혼이 안 되고 취업도 안 되고 먹고살 것도 안 되는 등 여전히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지가 바르게 설정되면 아무리 거세고 힘들어도 한 발짝씩 인도하십니다. 성도의 인생은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올바른 목적지로 향하는 우리들 호에 타고 있으면 내가 보면 늘 제자리 같지만 나선형 계단처럼 남이 보면 조금씩 올라가고 있습니다. 항해는 헬라어로 아나고인데,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라는 뜻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에 간신히 항해했다고 하는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 간신히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화되는 것, 거룩한 길은 간신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힘들고 좁고 눈물 마를 날이 없을지라도 목적지만 바르게 붙들고 간다면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되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