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약속]
행 26:1~7
지난 주일에 성령의 상소를 할 때 너무 위축 되니 성령의 위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천국 백성의 확신인데, 지금은 희미하게 보여도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약속을 받아 누려야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위엄을 갖춘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은 변명에 앞서 손을 듭니다. 여기에 쓰인 들다라는 단어가 에크테이노인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거의 예수님께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능력을 의지한다는 기도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위엄으로 가득 찬 접견 장소에서 당황하거나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 짧은 순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당할 때 감정에 휩싸여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손들고 나와야 합니다. 내 감정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손들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매일 정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날 상황을 그날 말씀으로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그 묵상 자체가 주님께 손을 높이 드는 것이고 그날 말씀대로 기도하는 것이 모든 적용의 시작이기에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둘째, 어떤 일도 다행히 복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다행히이라고 번역한 말은 마카리오스 즉 복되다라는 단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바울은 지금 자신을 복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겹게 반복되는 심문과 조사의 자리에 다시 선 바울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약속받은 인생 자체가 복된 인생임을 알면 어떤 일을 만나도 그것을 다행히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행한 일인데 성령의 약속을 받은 성도의 관점에서는 그 또한 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왜 복이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할 전도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체포된 이후 로마로 이송되기 직전까지 모두 다섯 번의 변론을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법정에 앉아서 남을 판단할 만큼 윤리적이거나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함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란다.라고 하는데, 이는 최고 지도층 앞에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길어서 듣기 힘들어도 끝까지 견디면서 들어주시라.고 겸손히 요청한 것입니다. 결코 무례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고 친절하게 자신의 지나온 행적과 신앙을 변명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위엄을 받고 자신이 복있는 사람임을 아니까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합니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는 전도의 사명입니다. 가족의 안녕도 내 인생의 과정과 결론도 모든 것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기복의 약속이 아닌 팔복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약속이 나사렛 예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지만,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학대받는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던 것처럼 정치적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기복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기복의 약속을 바라고 있으니 성령의 약속을 이루신,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성령의 약속은 기복의 약속이 아니라 팔복의 약속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 전하는 증인입니다. 증인은 마르티스라고 너무 유명한 단어인 순교자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려면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넓고 편한 길 가라는 것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 가라는 뜻입니다. 기복이 아닌 팔복을 쫓아가는 삶은 정말 본성을 거스르는 삶이지만 이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상히 여기며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공동체 고백은 정말 변할 것 같지 않은 딸 때문에 지치고 낙심이 되었는데 그래도 결국 말씀으로 힘을 얻고 성령의 약속을 붙들고 자유함을 지금 알게 된다는 나눔입니다. 제가 요즘 많이 의심하는 것은 내 딸들이 진짜 변할까?입니다. 딸 둘이 날마다 주먹싸움하는데 서로 너무 미워하고 있으니 저도 애들 쳐다보기도 싫고 방임하고 포기하는 것 같다고 남편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큰 딸이 아빠에게 자기는 사각턱이니 보톡스를 해달라고, 그리고 엄마에게는 이마라인 문신을 해달라고 했답니다. 아이들이 청소년인데 머리 조금 짧게 잘랐다고 울고불고 한 달 동안 붙임 머리 비용 4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해서 겨우 설득해서 말렸더니 이번에는 양악수술 해달라고 했답니다. 아내는 구원을 위해 참아야 한다는데 어디까지 참아주어야 하는가 싶고 아이가 ADHD와 조울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도 미워지고 안 변하는 저 때문에 수고하는 것 같고, 정말 이 아이가 변할까에 대해 의심하고 절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남편은 정말 자녀 양육이 회사 다니는 것보다 백배는 힘든 것 같다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야기도 더는 못하게 막는 아이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대상이 우리 딸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기도하며 복이 있다고 외치고, 특히 팔복을 부르짖겠습니까? 선남선녀 같은 아빠 엄마가 이렇게 기막힌 환경에 있으니까 서로 목자가 되어서 예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서 이렇게 약속을 붙들고 가시며 복 있는 인생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야 합니다. 이 짧은 인생길, 천국에 가게 하는 식구들과 환경이 가장 공로자이기 때문에 오늘 내가 복이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어려움을 겪지만, 수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바울을 생각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자신을 복 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기복의 약속이 아닌 팔복의 약속을 붙들고 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