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위엄]
행 25:23~27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변호사가 법률 실력이 탁월하여 그 실력 하나로 약자를 살려내니까 이상한 부분이 다 감춰지고 좋은 일을 하는 데는 위엄이 따르게 됩니다.우리도 성경 구절 하나로 사람들을 살려내면 우리의 모든 지질한 것들이 다 감춰지고 성령의 위엄이 따르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상소는 인내가 따라야 하는데 비굴과 위축감으로 인해 인내하면 아니함만 못합니다.구원은 이 세상 어떤 좋은 일보다도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에 구원 때문에 인내하면 위엄을 주십니다.
첫째,성령의 위엄은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집니다.
지난주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고 하니 베스도 총독이'내일 들으리다'하며엄청난 쇼를 계획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위엄을 갖추고 접견 장소로 나옵니다.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왔는데 특이하게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고 묘사합니다.즉 위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엄이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이 심문 쇼를 이렇게 대단히 화려하게 한 것은 바울에 대해 그만큼 열등감이 있어서 꾸몄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바울이 입장하는 장면을 원어로바울이 끌려 나왔다의 뜻으로 표현했는데,바울이 높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심문받는 모습입니다.바울은 지금 위엄을 뽐내는 다수의 높은 사람들 앞에서 세상 위엄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초라하기 짝이 없고 외모에서도 아주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택자입니다.바울은 이런 초라한 조건에도불구하고 조용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기풍과 자신감으로 법정을 압도했습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하지,사람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세상의 위엄이 허상임을 알고 성령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여 지금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에 위엄이 있는 것입니다.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위엄은 위로부터 주어지는데,그럼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딥니까?바로 죄인의 자리입니다.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에 있을 때,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환자가 자신이 환자임을 알 때 탁월한 의사의 위엄이 환자에게 임하듯,우리가 정말 죄인임을 알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성부 성자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덮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위엄이 우리를 이끕니다.
둘째,성령의 위엄은 한 영혼을 살필 때 주어집니다
큰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접견 장소, place of hearing,즉,목장에 나왔습니다.하지만베스도는 바울의 실상을 이미 다 파악했으면서도황제에게 보고할 만한 진상을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말합니다.왜냐하면 자기의 위엄을 더 드러내기 위해 바울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신이 황제에게 더 정확한 보고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연출하고 있습니다.우리는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이런 사람을 참 많이 만납니다.그런데 우리의 선함과 착함은 자신을 속이기에도 충분하고,우리의 선함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기에도 충분합니다.즉 착한 게 악한 것입니다.베스도는 이 사건을 잘 살펴서 정말 바울에게 문제가 없었음을 알고 즉시 풀어줬어야 합니다.그러나 유대인 원고들이 너무 유력하기 때문에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위엄은 나에게 맡겨준 한 사람을 책임지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어.네가 문제야.나는 이 문제와 상관이 없어.'하는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도'나도 너와 상관없다.나도 널 책임지지 않는다.'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목사도 목자도 다 마찬가지인데 목사에게 위엄이 주어지는 것은 멋지게 설교할 때가 아닙니다.목자에게 위엄이 주어지는 것도 잘 가르쳐서가 아닙니다.정말 죽어가는 한 영혼,한 가정을 살리고자 할 때 위엄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셋째,성령의 위엄은 무리한 일을 분별할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앉아 있습니다.그동안 더둘로 변호사가 와도,대제사장이 와도,이스라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와도,모든 법에 능통한 로마 총독이 두 번이나 바뀌어도 심지어 유대 법에 정통한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와도 바울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런데 바울은 어디를 가나 설교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이렇게 자신이죄수임을 알고 인정하며 가는 사람은 사건이 와도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어떤 사건이 왔을 때 옳고 그름만 따지고 '나는 죄목이 없으니 죄인이 아니다.'한다면,베스도처럼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고 죄목만 찾다가 싸움만 나게 됩니다.죄목이 없지만 내가 죄수임을 아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위엄입니다.우리가 죄를 오픈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했더라도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죄에 대해 온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목장에서 늘 오픈하고 고백함으로 날마다 내 속에 다시 살아나는 그 죄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왜 이런 남편과 살고 있고,왜 이런 적용을 하고,왜 오픈하고,왜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을 끝까지 돌봐야 하는지,구원과 십자가를 모르면 이 모든 것들이 무리한 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그러니까 이성과 합리의 토대 위에 살아온 베스도는 바울로부터 비롯된 상황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죄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나는 문제가 없어!'가 아니라목장에서 함께 나누며 공감하고 나에게 허락한 가족과 지체의 아픔을 함께 책임지려고 결단하고 적용하려고 할 때,그렇게아파하는 너를 함께 살필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그래서 정말 약속하신 말씀대로,하나님의 위엄이 내 앞에 임하며 모든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이것이 성령의 위엄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위엄이 임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주가 일하시는 것을 보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