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자유]
행 24:17~23
제가 이번에 다녀온 선교여행에서 고위직에 계신 어떤 분을 만나 복음 제시를 했는데, 그분이 영접하셨습니다. 직장에서 관계 문제로 상대방에게 아무리 사과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해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 때문에 저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으니까 그분이 공로자이고 고마운 분이니 사과해보시라고 했는데, 적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과하고 나니 상대방과 상관없이 마음이 평강하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 읽고 보며 왔는데, 제가 이번에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 있던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갖은 핍박을 받으며 바울의 눈물로 세워진 선교지였던 그곳에는 이슬람이 거의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 믿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교회나 터키의 소아시아교회가 그대로 있었다면 전 세계의 성지가 되어 아마 관광객들로 터져나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화되는 것을 싫어하셔서 교회들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시신도 없게 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소아시아 교회가 있던 터키에는 알라를 믿는 이슬람으로 거의 채워졌는데, 이슬람은 이스마엘의 후예들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큰 자다라고 하며, 영적인 피해의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라로 무장되어 있고 행위로 천국 가야 하기에 경건함과 종교심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예인 마호메트를 믿는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 사우디에 가야 하는 조항이 있는데, 마호메트의 출생지 사우디의 메카가 성지가 되어서 12월에 한꺼번에 수백만 명이 참배하면서 마귀를 쫓기 위해 마귀 돌기둥에 돌을 던집니다. 또한 가까이 가서 던져야 하므로 해마다 큰 참사가 일어나는데, 그곳에서 죽으면 천국 간다고 그렇게 부러워한답니다. 그래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키다 죽어도 알라를 섬기다 죽는 것이니 기쁨으로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춘 것 같지만, 없는 것은 자유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변명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증거합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지만, 오직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한 것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합니다.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에서 더둘로와 경쟁해서 이기겠다고 변론하지 않고,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붙들린 바울의 모습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가장 큰 권세인 죽음을 이겼기 때문에 아무리 갇혀서 재판받고 누가 뭐라고 해도 절망의 옥 부정의 옥 미움의 옥에 갇히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인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 복음이 나에게 오면 자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자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합니다.
둘째, 치우치지 않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치우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무섭게 믿으면 안 됩니다. 이번에 선교지를 다녀 보니까 각 나라에서 드리는 예배가 다 치우쳐있었습니다. 정말 변화되려면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래전 제가 여성 목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니까 이단 소리를 듣지 않겠냐고 어떤 기자가 제게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누구 비위를 맞춘 것도 아니고 평신도 집사로 사역을 하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 복음이 확실하고 내가 말씀으로 죽었다가 살아났고 말씀으로 치우치지 않고 왔다고 했습니다.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이 영혼 구원이기 때문에 영혼 구원 때문에 큐티도 하고 찬양도 하고 적용도 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날마다 가만가만 오늘 말씀이 뭐라고 하지? 하니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신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교회 역시 말씀에 치우쳐있어서 찬양 시간에 처음부터 오지 않는데, 자유함이 넘쳐서 방종으로 가면 안 됩니다. 이번에 루마니아 국회 초청을 받아 간증했는데 삶으로 간증하니 다들 집중해서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큐티인이 보급되는데 굉장히 영향을 미칠만한 일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셋째, 삶으로 살아냅니다.
바울이 이렇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 벨릭스가 그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안다고 합니다. 바울이 설명한 것보다 더 자세히 알면서도 무죄인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뇌물을 받고 아나니아의 뜻을 꺾기 민망해서 판결을 연기하고 바울을 다시 감금하였을 것입니다. 벨릭스는 예수의 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도를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삶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는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데, 벨릭스는 예수의 도를 따른 게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의 눈치만 보면서 자기 욕망을 따랐습니다. 반면 바울은 구속이 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도를 따라 삶으로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도를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 반드시 일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는 것을 넘어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넷째, 복음 전하는 자유입니다.
벨릭스도 자신의 결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바울에게 선고를 연기하고 자유를 주라는 큰 호의를 베푸는 척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배려해주는 것 같은데, 오히려 갇혔지만 갇히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에 테러당할 뻔한 처지를 생각하면, 안전하게 지켜주면서 신변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으니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입니다. 바울은 벨릭스가 부여한 자유를 이용하여서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갇혀있든 편한 환경이든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자유함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나는 억울하다. 내가 왜 갇혀 있냐? 이래서 화가 나고 억울하고 그래서 교만하면 거기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남편을 천국에 보내고 자유가 주어졌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유가 최고의 자유인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목장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자유를 누리니 일주일을 잘살게 됩니다. 내가 있는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겠노라 결단하면 최고의 자유함이 밀려올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전하며 균형 잡힌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자유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상처가 약재료가 되어 현재 내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유함을 알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