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강론]
사도행전17:2-9
바울이 성령의 전략을 따라 자기의 관례를 지켜 데살로니가 회당에 들어가서 3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고 합니다. 이 강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강론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으로 구속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는 3주간 유했는데 자기 전략이 없었고, 자발적인 자기 관례대로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전략으로는 안 들어갔겠지만,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거룩을 위한 관례에 자신을 쳐 복종시킨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경에 대해서 강론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 다른 어떤 내용에 대해 강론했다는 말입니다. 설득했다기보다 성경을 펼쳐 놓고 그저 아는 사실을 증명하면 되는데, 바울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자신의 구속사로 증거를 제시해서 증언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부활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임을 간증하는 것이 성령의 강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강론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세속사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지금 내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고백하고 간증하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론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따라야 합니다.
둘째, 따르는 딱풀 성도가 생깁니다.
회당예배 중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의 회당이니 유대인들만 모이는데 그 중 개종하고 온 경건한 헬라인이 모인다 해도 유대인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성경의 강론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대부분과 귀부인도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권함을 받고 여기 따랐다고 합니다.
따르다라는 뜻은 제비를 뽑아서 몫을 전해주다 즉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바울과 실라의 몫으로 딱 할당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핍박 받아서 떠난 바울과 실라에게 이렇게 딱풀 같은 성도가 생겼습니다. 강론이 올바르니 성령의 따름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강론으로 권함을 받은 사람은 가치관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위해 살고, 이기려는 삶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자기 전략에서 성령의 전략으로 바뀐 삶을 살 게 됩니다. 딱 한편이 되어서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안 질 수 없습니다. 승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한편입니다. 똑같은 귀부인이라도 1차 선교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력자들과 경건한 귀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동되어서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냈습니다. 호강만 하던 겉모습의 귀부인들이었을 텐데 이 자유도시에서 왜 그렇게 복음을 따랐을까 생각해보면 남편의 타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생이 허무했을 것이고 그래서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귀부인들이 딱풀 성도로 딱 바울 복음을 듣고 딱 달라붙었습니다.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야손이 따르게 되었는데 유대인이 고용한 불량배들에 의해서 야손과 그 집에 있는 형제들이 아주 어려움을 당합니다. 법정에 끌려가 감옥에 갇힐 뻔하였고, 선동당한 시민들이 일으킨 소동을 다 받아냅니다. 그리고 큰 금액의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납니다. 성령의 강론에 감화되어서 바울과 실라, 나아가 예수님과 한편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엄청난 적용을 자발적으로, 자기 관례가 되어서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몫으로 할당해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바울도 야손도 잘난척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딱풀 성도도 있게 하시고, 아니게도 하십니다.
셋째, 시기하여 소동하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여기서 시기하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항쟁하다, 겨루다, 열광적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기와 같은 심리적인 역반응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광적으로 흥분이 되어서 바울 일행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이 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기, 질투, 경쟁심 등의 뿌리는 똑같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욕심입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동료가 인정받을 때 더 많이 질투합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아주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인데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악한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저자의 불량배들을 매수해서 시민들을 선동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반역자들이 이곳에 왔다면서 소동을 일으키며,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한 야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며 바울을 잡으려고 합니다. 바울을 놓치자 대신 야손과 그 집에 있던 성도들을 잡아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 자라고 반역자로 몰아서 온 도시에 소동을 일으킵니다. 시기에는 이렇게 소동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구속사적 강론을 듣지 않습니다. 교회가 가이사를 거역한다고 비난하는데 정작 자기들이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괴롭히고 훼방꾼 노릇을 하는지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는 바울도 생명을 내놓고 기도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유대인은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안 믿는 자입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한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이런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행위 구원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시기할 수 있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지?' 이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만 하면 다 붙게 되어 있고 낫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믿음이 없으니까 죄를 모릅니다. 아프고 떨어지면, 건강하고 붙은 자가 저절로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 구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이런 애끓는 마음으로 성령의 강론을 들어야 합니다. 나 혼자 도덕 잘 지키고 윤리적으로 잘 살고 교통질서 잘 지킨다고 영혼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정의 한 사람이 중요하고 목장의 한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 흘리고 가면 다른 것은 저절로 되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강론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같이 소동케 하는 성도들이 꼭 있게 하십니다. 유대인을 욕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있게 하시니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가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