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신사]
사도행전 17:10~15
살로니가 전도를 한 후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오늘은 베뢰아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신사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독불장군이 아닙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약80km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습니다.그런데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바울에 대해 소동이 나자 밤중에 바울을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합니다.바울은 성령의 전략에 따라 수치를 무릅쓰고 데살로니가에서 탈출했습니다. 보내다 (10절)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두 번 쓰였는데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할 때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 (행13:4)에서 사용되었습니다.누가는 야반도주가 사실상 성령의 전략에 따른 파송임을 표시하기 위해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바울은 피해야 할 상황에서는 수치를 무릅쓰고 피했지만,관례에 따라 전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사람이었습니다.그는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기까지는 아시아 전도만 생각하고 유럽에는 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순종하고 마게도냐에는 왔지만,지리도 잘 모르고 풍습,문화도 몰랐습니다.그런데 그 모른다는 것을 바울이 인정하고 성도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성령의 신사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그 밑의 제자,동무들에게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복음의 신사는 복음에 유익하다면 즉시 순종했습니다.고리타분하지 않았습니다.바울은 결코 독불장군처럼 하지 않았습니다.늘 다른 사람들과 협력했습니다.바울만큼 동역자를 중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동역자라는 단어 자체가 바울의 단어라고 했습니다.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베뢰아 성도들이 이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바울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사도바울을 도왔습니다.유대인들이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데도 바울을 돕는 사람들은 곳곳에 있었습니다.이렇게 서로 협력하는 신사와 숙녀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든지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둘째,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더 너그럽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했는데 원문의 구조로 보면 그 반대입니다.즉,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기 때문에 말씀을 간절히 받았다는 게 아니라,반대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에 신사적이라는 것입니다.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대하는 열정도 으뜸이었지만,더욱더 눈여겨보게 되는 말씀은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입니다.여기서상고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가아나크리노라는 단어인데 강렬한 의지를 갖추고 반복하는 접두어아나와,접속사로는위에라는 단어인데,여기다 구별하여 판결,결정하다는 동사크리노가 합쳐진 단어입니다.그러니까상고하다에는판결하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나크리노는 판사가 재판을 하기 위해 증거물들을 꼼꼼하게 반복적으로 살펴 판결할 때 사용했습니다.즉,말씀에 비추어 나를 자세히 살피고 내 삶의 티를 골라낸다는 뜻인데,티를 골라내려면 조사하고 검토하고 먹고 씹어보고 그래서 적용해서 행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 상고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강론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분별하여 판단했을까요? 13절에 다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와서 소동했다고 합니다.그래서 바울의 말씀이 진짜인가,분별해야 했습니다.날마다 상고했다는 것은 이 말이 진짜인가,가짜인가,유대인들의 거짓 가르침을 구별하는 잣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 고민했다는 것이그러한가 하여 (11절)입니다.티를 골라내기 위해 조사하고 검토하고 먹고 씹어보며 삶에 가져와 분별해보니, 예수가 그리스도다이것을 골라냈습니다.그러니까 간절함으로 상고했다는 것은,반드시 간절함으로 상고함과 분별과 판단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니 베뢰아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셋째,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믿었다는 소식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지니,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13절).데살로니가에서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베뢰아 시민들을 선동합니다.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길임을 확신했습니다.유대인의 선동으로 도시가 시끄럽게 되자 베뢰아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했던 것처럼 바울을 탈출 시켰습니다(15절).이 단어 역시10절의보내니처럼 사명의 길로 파송했다는 뜻입니다.그런데 이 베뢰아 성도들이 더 신사적이니까,말씀을 더 좋아하니까 바울을 보내기 싫었지만,성령의 신사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령의 보내심에 협력했습니다.그런데 이번에는 바울 혼자만 갔습니다.점점 위험해지니까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혼자 갔습니다.하루하루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사역 하였습니다.홀로 떠나는 바울도,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된 베뢰아에 남은 실라와 디모데도,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는 모습입니다.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를 위해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하지만 베뢰아 성도들,즉 무명의 초신자들은 마게도냐에서 아덴까지 가는 길이320킬로 정도 되었고,시키지도 않았는데 동반자가 되어 거기까지 수행해서 바울을 모셔다드리고 돌아왔습니다.육로가 있었지만,그들을 따돌리고 해상으로 갔습니다.바다를 통해 갔지만,사실은 육로로 갔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전쟁이었고,성령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무리가 되고 형제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갔습니다.질릴 만큼 집요하고 끈질긴 방해와 괴롭힘에도 그 길을 멈추지 않게 하신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이십니다.집요하게 공격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죠.따라서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세상에서,말씀과 가정중수 사명의 길에서 중도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그 길을 완주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고품격 인생,성령의 신사와 숙녀로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성령의 신사가 되시는 한 주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