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구원]
행15:1-5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는데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는 다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의와 희락과 화평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일 년간 가르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아주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를 비우고 1차 전도여행를 갔다 온 그 사이에 아주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빠진 것입니다. 개종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대전통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자꾸 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들을 전도해서 엄청나게 부흥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자랑인 율법을 가르칠 대상을 만나기 위해 500키로 미터나 되는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한번만 가르친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부지런하게 열성적으로 가르치니까 안디옥 교회 교인들 중에서 구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초신자라서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밖에 모르는데, 경건한 사람들이 성경과 유대교 역사를 읊어주고 나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니 너무 멋있어 보였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영접기도도 따라하는 등 분명히 믿음은 있었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흔들거립니다. 반면에 유대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믿음은 없는데 확신이 충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유대교도 아브라함의 구속사로부터 시작했지만 시기마다 이렇게 변질이 되는 것은 사람은 원래 본능적으로 기복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확신이 필요한 것이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교회에 있다고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지만, 믿음은 그리스도 말씀을 들으면서 나기에 오늘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을 들려드릴 때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확신이 생기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인본적인 가르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툼이란 맞서 일어나 대항하는 것이고 변론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서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인데,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 정체성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말하면 안 믿을 수도 있을 텐데 모교회인 특별한 권위를 가진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가르치니 그 권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로 논쟁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적 가치관에 대한 바울의 변화된 태도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습니다. 방황을 멈추게 할 답은 말이 아닌 변화된 삶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통해 옛사람의 잘못된 가치관을 조금씩 버리게 될 때 환난이 주제가 되고 말씀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성령의 변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고난과 광야를 깨달을 수도 인본적인 가치관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에 맞서 변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돌이켜야 각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랜 변론을 듣고 있던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편 가르기나 다수를 이용한 힘으로 교만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윗 질서인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묻기로 결정합니다. 이런 안디옥 교회의 순종의 결정은 흥왕하는 말씀으로 양육 받은 결과입니다. 바울 복음은 전 세계가 인정한 복음이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주장만 하지 않고 관계질서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변화된 삶으로 변론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이렇게 삶의 변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로 가는 길에 해변가에 있는 베니게와 내륙에 있는 사마리아를 들렀습니다. 세속적인 이방을 대표하는 베니게와 앗수르와의 혼혈족으로 이방보다 더 무시 받았던 사마리아는 스데반 순교 때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1차 전도여행의 결과를 이곳 교회에 보고했더니 너무나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 이방인처럼 차별받고 그 처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조건 없이 주신 은혜의 구원을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구원 때문에 함께 애통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지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고 이런 목장이 구원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이제 새해가 되어 목장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프고 슬픈 상황이지만 새로운 목장에서 큰 기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어디를 가도 우리는 인내해야 될 것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셔서 이 전도를 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을 때, 베니게와 사마리아 성도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 바리새인들은 구원의 열매가 있는 바울에 대해 공격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길은 힘들고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의 힘으로 계속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격을 인내하면서 받아내며 설득해 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길입니다. 결국 성령의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87세의 석학 이어령 교수님은 췌장암을 앓고 계시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보았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입니다. 코로나19라는 주술에서 벗어날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중략)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입니다. 라고요.
이기적인 눈물 일지라도 흘리다 보면 이타적으로도 바뀌어갈 수 있는 것이 눈물입니다.
올해는 모든 성도들이 눈물 한 방울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구원을 위한 구원의 눈물을 흘리는 2021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