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진행]
사도행전9:22-31
코로나19로 인해 2주 연기해 드리는 부활절 예배로, 10주차 온라인 예배입니다. 각자 인생에서 이혼, 결혼, 취업 과 사직 등을 진행해야 할지 아리송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를 아무리 받아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진도를 나가야 합니다. 이 설교가 각자 진도를 나가게 되는 성령의 진행이 되면 좋겠습니다.
첫째, 여러 날이 지나야 합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살기가 등등했던 만큼이나 그들이 거절하고 안 믿어도 힘을 더 얻어서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굴복을 시켰습니다(22절). 그런데 사울이 센 만큼 여러 날이 지나면서 훈련을 받았는데도 그들에게 사울을 죽이는 공모가 시작이 되었습니다(23절). 우리도 예외 없이 여러 날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이 여러 날은 사울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적당한 날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 있었고 혈육과도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도 가지 않았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의 회심과 사명은 혈육과 의논할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정오의 빛의 회심이 너무 강렬해서 누구하고도 이야기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여러 날을 지낼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죽이기로 꾀해도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집니다(24절). 택자이기 때문에 뒤집어지는 회심을 하면 내 앞에 있는 길이 어떤 고난이 와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큐티가 중요합니다. 결국 아무리 계교가 판을 쳐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가 없고 아무리 밤낮으로 사단이 나를 지켜도 나를 광주리에 태워서 보내줄 제자들이 있는 것입니다(25절). 그런데 제자들이 사명을 위해서 보냈기 때문에 사울은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이 치사스럽게 살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러워도 예수 만난 기쁨을 빼앗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스데반을 죽였기 때문에 쓰레기 버리는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도 할 말이 없다고 하니,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최고의 신의 한수이며 양육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나 혼자 죽인 것이 아니고 여럿이 다 함께 돌로 쳐 죽였다고 책임회피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을 돌렸습니다. 항상 공로는 남에게, 책임은 나에게 돌리는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안 믿는 유대인들은 사울이 변절했다고 죽이려고 하고, 믿는 사람들은 어제까지 죽이겠다고 하던 사울을 어떻게 믿느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다 멀리합니다(26절).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삼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그 사람들은 잊히지 않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사방이 열렸다는 뜻이며, 저주는 사방이 막혔다는 뜻입니다. 사방이 막히면 앞으로 나가지를 못합니다. 과거를 잊어야 사방이 열려서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인데 아픈 사람들은 입만 열면 과거를 읊조리기에 사방이 막혀서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정신의 많은 아픔은 대부분 과거를 잊지 못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과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잊어버려야 남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를 무조건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과 육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100%죄인이기 때문에, 회심도 안 했는데 인본 적으로 생각해서 사람은 믿어야 한다고 결혼을 시키는 것은 또 다른 악이고 무지의 소치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주의 일을 한다고 해도 어디를 가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참 성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성도들과 진실한 교제를 가진 소문이 나야 합니다. 혼자 외로운 훈련을 받았어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귀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과거를 무조건 잊으라는 것은 아니며, 내가 감당할 것이면 잊고 나아가야 되지만, 모두에게 알려진 과거라면 인정하고 쓰레기 담는 광주리 타고 도망가는 수치를 감당해야 됩니다.
셋째, 반드시 형제지체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면 반드시 지체를 주십니다. 바울을 소개해주는 바나바가 있고 아나니아가 있습니다(27절). 그래서 기다리다보면 여러 날 훈련 받아서 영적 통찰력과 사람 보는 눈이 생깁니다. 한 성령이면 함께 제자들과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28절). 함께 있어야 여러 날이 지나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검증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게 바나바가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함께 있으며 양육 받는 것은 전도가 목적입니다. 하지만 자기 동족 헬라파 유대인들은 전도가 아니고 변론이 되었습니다. 변론을 하니까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죽이려고 힘씁니다(29절). 바울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형제들이 다소로 보냅니다(30절). 헬라파 유대인들이 논쟁에서 패하니까 죽이려고 하는 것이며, 논쟁을 통해서 더 적극적인 적을 만들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변론하지 않고 피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죽이려고 할 때 다소로 보내줄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자기가 양육한 형제가 생겼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큰 축복이 형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도바울이 힘들어서 간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보내주었습니다. 내가 이타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형제인 지체를 주셔서 어디로 가야 할지 성령의 진행을 도우십니다.
넷째, 수가 더 많아집니다.
바울 한 사람이 죽음의 고통으로 훈련을 받고 있으니, 계속 죽음의 위협에 있지만 온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간다고 합니다. 온 유대는 믿는 곳, 갈릴리와 사마리아는 환란당하고 무시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성령의 흩어짐 속에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서로 상생하고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으로 인도받고 가는 하루하루가 성령의 진행인줄 믿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적, 교회적, 나라적으로 흩어져도 우리가 치열하게 말씀보고 가는 길이 얼마나 성령의 진행인지 보이기 위해서 성령의 진행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수가 늘어가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이 살아나니까 교회가 살아나고 나라도 살아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