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위로]
사도행전 9:19-31
바울이 성령의 회심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오늘 성령의 위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성령의 위로를 주십니다.
늘 예수님의 제자를 죽이고자 했던 유대인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함께 있었던 사울이 기독교인 제자들과 며칠을 있게 되었습니다(19절).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이 강타하니 성령의 회심이 되어서 원수 같던 제자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하게 되니 그동안 적대시했던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고, 자기편이었던 유대인들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둘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성령의 위로를 주십니다.
제자들과 며칠이 지내자마자, 바울은 즉시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19-20절). 이것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에게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였고, 사도행전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했던 이유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신성 모독죄로 처형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사울 역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믿는 자들을 잔멸했습니다. 그런 사울의 태도가 회심사건 이후 정반대로 급변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습니다.
셋째,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성령이 위로하십니다.
듣는 사람이 '사울은 그 모두를 멸하려던 자가 아닌가? 지금도 멸하려고 온 게 아니냐?'(21절)고 합니다. 사울은 이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22절)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감정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논리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사울처럼 자기 확신이 많고 성공을 위하여 못 할 짓이 없던 사람이 해보다 밝은 빛의 간증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니, 다마섹에 살던 동류였던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 하면, 꽃길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넷째, 죽음의 고난에서 성령의 위로가 임합니다.
여러 날은 19절의 며칠과 대조되는 충분한 시간으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당혹해하고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니, 지금은 열심으로만 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아라비아로 간 3년여의 기간(갈라디아서 1:17)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는 지금의 요르단 지역인데 굉장히 요새 같은 지역이라서 로마의 감시에서 벗어난 작지만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라바티안 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집보다도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죽음의 문화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살아계신 생명의 주를 전했더니 거기서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무덤 사업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왕이 아레다 4세인데 그의 영향력이다메섹에까지 미쳐 유대인들과 같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회심을 한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고 고난이었습니다. 또한, 밤낮으로(24절)는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살폈다는 것입니다. 이때 도와주는 사람이 맨 처음 성령의 회심을 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아라비아에 3년 갔다 온 다음, 사울에게 생긴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울의 제자들을 성벽 위에 들창문을 통해 큰 광주리에 담아서 사울을 밧줄로 내려보냈습니다. 바울이 도망갔다고 하지 않고 제자들이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24-25절). 사울은 수치스럽게 살려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때가 안 되었으니까 돕는 사람들이 강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위로입니다.
다섯째, 중재자를 보내주셔서 위로하십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이 지나고 돌아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가 바로 제자들과 사귀기 위해서(26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의 노력이 다 수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위로의 아들 바나바가 사울을 중재했습니다(27절). 사울이 회심한 직후에는 아나니아를 준비하셨고 지금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바나바를 준비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교회 성도들 중에서 최고의 신뢰를 쌓은 사람이었기에 사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그보다 더 적합하게 소개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나바의 애정 깊은 중재로 인해 사울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공동체 일원으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28절). 그 후 바울은 시종일관 거점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도시에 입성하면 언제나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는데, 그것이 유대인들의 격분을 사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토론이 성행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중시하면서도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울은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논리적 토론에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토론하면서 변론하니 유대인들이 토론에 밀린 것입니다. 그들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역자로 계속 프레임을 씌워서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형제들은 사울이 처하게 된 위기를 알고 가이사랴로 데려가서 다소로 배를 태워 보냈습니다(30절). 그 후 그리하여(31절)는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교회 박해로 인해 생긴 일들 모두를 의미합니다. 흩어진 이후부터 그때는 예루살렘 교회밖에 없었는데, 이 박해로 인해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평안하여 든든히 서간다고 했습니다. 더욱 주를 경외함이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위로로 진행해서 너무나 비약적으로 부흥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흥의 배후에 왜 성령의 위로로 진행되었다고 할까요? 스데반 이후 박해를 통해서 다 흩어졌을 때는 핍박을 해서 다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곳곳에서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시대는 로마 황제가 황제 우상화를 행하던 시기여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박해하는 것에 정신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박해가 약해졌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평안하고 든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100% 옳으신 성령의 위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몰라도 그냥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면 그 자체가 응답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간증과 말씀으로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