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증인]
사도행전 4:1-22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를 했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제 성령의 증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증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증인은 핍박이 따릅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면서 회개하고 죄사함 받으라고 성령의 권능 설교를 하니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유대교 지도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니,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로마와 결탁하여 최고의 부귀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6절에 나오는, 로열패밀리 안나스 가문의 대제사장들은 A.D.7-15년까지는 안나스가, 그 사위 가야바는 A.D.18-35년까지 대를 이었는데 이 가야바는 한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고 뒤이어 사도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앞장서는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영육간에 최고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사도들을 죽여도 그들은 이 세상의 권력으로 찬란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그들이 방해하고 핍박해도 복음은 퍼져 나가고 결국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한 권세를 주십니다.
예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였는데 성령의 권능을 받은 지금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증인이 되어 성령 충만하게 답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권세로 어떻게 대답을 하는지 세 가지로 보겠습니다.
(1) 성령 충만한 권세로 예의를 지킵니다.
8절에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는 하대하는 말이 아니고 '장로들이여'라는 번역이 더 맞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는 독선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 감성, 이성, 다 무시하면서 부르짖는 태도로 독선적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 지혜는 너무 필요합니다.
(2) 성령 충만한 권세로 악한 질문도 구원의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합니다.
9절을 보면, 베드로는 우선 앉은뱅이의 치유는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았던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 착한 일은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의 능력이 그 영혼까지 구원할 것임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베드로는 '이 착한 일에 대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으신다면'으로 질문을 바꾼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는 것이 다냐?라는 질문을, 오늘 나에게 어떻게 구원을 받았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구원의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하는 것이 성령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권세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인생인데 이 모든 영육 간의 아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인 것을 또 밝혔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족인 산헤드린 공회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내 스승이며, 하나님께서 만방에 드러내야 할 영광스러운 이름이라고 계속 나사렛 예수, 그 출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비천한 나의 출신을 편안하게 이야기해야 성령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퉁이의 돌이 머릿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이미 예언하셨고,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버리는 게 무엇일까요? 나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쓰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한다면 그게 다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인데, 끝나지 않는 고난을 탓하면서 늘 권세 있는 사람과 돈을 구하면 우리는 스스로 버려진 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도 남도 버리지 않아야 머릿돌이 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버려진 돌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넷째,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평민, 무식쟁이, 촌놈이라는 뜻으로 쓰인 13절의 '범인'은 심문자로 선 공회원들이 피고석의 베드로와 요한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적대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회원들이 베드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베드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40년을 다 같이 보아온 그가 가장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잘 사시며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치유하시고 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보고, 그 삶을 나누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을 성령이 임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증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이 권세 있는 줄을 알기에, 예수 이름만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은 다 해도 좋은데 예수 이름만 쓰지 말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진짜라는 증거입니다. 19-21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경 박사인 그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님 이시기에, 땅끝까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나를 죽여도 좋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겠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까 모든 사람이 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항상 내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나를 보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도들의 확신으로 성령의 증인이 되는 한 주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