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
이효숙 평원지기
벧전 2:18~25
안녕하세요. 목양국을 섬기고 있는 이효숙 권사입니다. 오늘은 목양국 헌신 예배로 드립니다. 목양국은 새가족부, 양육부, 중보기도부로 이루어져 전방위로 성도들의 양육을 돕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고난 가운데서 양육과 큐티로 목장 안에서 다시 살아나 가정을 지켜온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죽음을 앞둔 베드로 사도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간절한 당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큐티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환들에게 까다롭고 부당한 주인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순종은 인간의 성품이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누구에게나 인내의 임계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큰 고생 없이 살아왔지만, 남편의 25년간 이어진 외도, 그 이후의 부도와 옥바라지의 시간, 그리고 자녀들의 방황을 겪으며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절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구속사의 큐티를 몰랐다면 이미 무너졌을 가정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요한계시록 1장 9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는 말씀이 제 삶의 해석으로 들렸고, 남편의 외도라는 저의 ‘밧모섬’이 예수의 환난과 참음에 참여하는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삶이 해석되자 질서를 무시하고 공동체를 차별했던 100% 죄인임이 인정되었고, 내 죄보다 고난이 약하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견디게 한 힘은 매일의 큐티였습니다. 큐티는 단순히 조용한 묵상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묻고 듣는 치열한 순종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매일 알아가니, 하루를 버티고 오늘까지 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큐티는 아침마다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설레는 습관이자, 내 욕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향하는 ‘떠남’입니다.
사자성어 '낭중지추'가 말하듯, 하루하루의 큐티로 쌓인 영육 간의 실력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새해에는 다른 어떤 결단보다 매일 큐티를 결단함으로, 우리들교회라는 보물창고 안에서 말씀의 보화를 날마다 캐내며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부당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힘든 상황을 견디려고 하나님을 주문처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며 내 죄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늘 제가 부당한 고난을 겪는 ‘피해자’라는 생각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양육을 통해 나 역시 가해자일 수 있음을 깨달았고, 모범생으로만 인정만 받던 제가 100%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 것은 제 삶의 기적입니다.
양육은 제 가치관을 구속사로 바꾸어 놓았고, 그 결과 남편의 오랜 외도와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오랜 외도가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제 고난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한 새가족을 보며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큰아들의 비행과 정신과 입원이라는 절망 속에서, 사명을 잊고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저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고백하며 사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교회에는 기초 양육과 THINK 양육, 양육 교사와 예비 목자 과정이라는 공식적인 양육 과정이 있지만, 사실 목장과 모든 공동체 모임 자체가 곧 양육의 자리입니다.
양육은 고난을 통해 나를 깨뜨리고, 결국 가정과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양육의 자리에서 내 아픈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 그것은 누군가를 살리는 사명의 시작이 됩니다.
셋째, 목장에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고 참도록 부르심을 받았다(20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인데, 목장이 바로 이 부르심을 따라 각자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의 고난을 말씀으로 정화하는 곳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목장이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한 말들과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로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몇백 원을 아끼는 이야기를 한 시간씩 늘어놓는 집사님이 답답해, 만 원을 던져주고 싶을 만큼 제 안에는 차별과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부도의 사건을 지나며 그분들의 아픔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목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제 밑바닥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큰아들의 정신과 입원과 두 아들의 방황으로 숨 쉴 틈 없던 시절, 저보다 더 애타게 기도해 준 목장 지체들이 있었기에 제가 살았습니다.
목장은 예수님이 주인이신 자리입니다.
“죽겠다. 이혼하겠다.”라는 절박한 말과 위협 같은 말들이 오가기도 하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감당하신 그 자취를 따라 우리는 서로를 정죄하지 않고 품어냅니다.
저는 이제 노후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사명 따라 살다 사명 따라 죽는 인생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국임을 믿기에, 길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목장에 붙어 가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큐티와 양육, 그리고 목장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고난을 약재료 삼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며, 이 아름다운 구속사의 은혜를 온 세계에 선포하시는 담임목사님의 자취를 우리 또한 기쁨으로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