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여왕]
최대규 목사
렘 44:15~23
할렐루야! 밥 잘 사주고 예쁜 여섯 살 연상의 누나를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다가 십 년의 빚 갚는 흉년을 지나며 비로소 말씀이 들리게 된 최대규 목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유다는 망하고도 하나님보다 성공과 풍요를 상징하는 아스다롯, 곧 ‘하늘의 여왕’을 따랐고, 특히 여인들이 앞장서서 그 우상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외모, 돈, 자녀의 성공이 ‘하늘의 여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 숭배를 악하고 가증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끊어내야 할 ‘하늘의 여왕’의 세 가지 모습을 함께 살펴보며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늘의 여왕은 듣기를 거절하게 합니다.
예레미야 앞에 온 무리가 모였지만 그는 먼저 여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남자 중심 사회에서 여인을 앞세운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공동체를 우상으로 이끈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해도 듣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던 마음까지 닫아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바벨론을 피하려 선택한 애굽의 깊은 내륙 바드로스는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고, 화려한 신전과 강력한 문화가 자리 잡은 곳이었습니다. 황폐한 남유다와 비교할 때 애굽의 화려함은 매력적이었고, 삶과 교육 또한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의 힘에 밀려 말씀에서 멀어지고, 영적으로 무뎌지며, 결국 예레미야의 음성도 하찮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살면 내가 안전한가?”보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 말씀을 듣기에 적합한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멀어지면 누구도 예외 없이 귀가 막히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인생에 때마다 예레미야를 세우시지만, 우상이 자리 잡으면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오래 무시하고 듣지 않았던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바로 장인어른입니다. 실패와 외로움 속에 살아오신 그분을 저는 마음으로 무시했고, 14년 동안 저에게 건넨 수많은 말들 역시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은 임종을 앞두고 제가 전한 복음을 들으시고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붙드신 은혜였고, 그 사건을 통해 제가 오히려 더 완고했고, 장인어른이 제 삶의 예레미야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늘의 여왕은 본래 하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남유다는 심판의 원인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여왕 숭배를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잘못 해석합니다. 듣지 않으면 삶의 사건을 잘못 해석하고 결론까지 흔들어 버립니다.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으로 산당을 헐고 우상을 금지했지만, 므깃도 전투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가 전사한 일을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폐했기 때문에 벌받았다’라고 오해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억이 공동체 전체에 퍼지는 것을 ‘집단적 오기억’, ‘만델라 효과’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이 왜곡되지 않도록 말씀을 기록하며 큐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실이 힘들면 과거를 미화하며 돌아가려 하지만, 남유다 사람들이 떠올린 과거는 결국 우상숭배뿐이었습니다. 우리도 힘들면 부모 세대의 죄, 우리가 끊고 싶어 했던 자리로 본능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생각은 의식의 영역이지만 말은 무의식의 영역이어서, 분노와 혈기, 절망의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옵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돌아가려는 자리’를 끊고 하나님 앞으로 ‘새롭게 돌아갈 자리’, 즉 예배와 큐티, 목장에 오는 것을 몸에 익히는 훈련입니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로, 부모가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죄의 자리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신앙 전수입니다.
한 청년 자매의 간증입니다. 어린 시절 술, 빚, 가출이 반복되는 아버지와 그 속에서 지친 엄마 사이에서 늘 불안과 외로움 속에 살았습니다. 청소년기에 방황하며 자해와 가출까지 했지만,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며 잠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사랑의 결핍을 남자 친구에게서 채우려 하며 다시 세상으로 떠났고, 혼전 순결과 십일조조차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이 부모님은 교회에 정착해 목자가 되었고, 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한 통의 전화가 마음을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겪으며 결국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예배를 회복하면서 하나님이 저의 삶을 놓지 않으셨음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인과응보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마련해 둔 ‘돌아올 자리’가 결국 자녀를 주님께 이끈 은혜가 되었습니다.
셋째, 하늘의 여왕은 교묘한 혼합주의로 포장합니다.
하늘의 여왕 숭배는 당시 애굽과 바벨론의 음란한 우상숭배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정적이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본질은 하나님 없는 혼합주의였습니다.
여인들은 남편 허락을 근거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화목과 평안을 누리려는 기복적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분향과 전제, 과자 만들기 등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즐거워 보이는 행위도 하나님과 무관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교회에 잘 다닌다”라는 겉모습에 만족하며 세상을 따르는 혼합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복은 하나님 없이 내가 누리고 싶은 평안입니다. 세련된 문화, 힐링, 재미,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스며드는 혼합주의 속에서,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회개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듣지 않아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상대가 듣지 않더라도, 우리의 말과 삶은 결국 자녀와 가족의 마음속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늘의 여왕과 세상 권세로 인해 듣기를 거부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큐티, 목장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이 돌아올 길을 준비하며, 혼합주의와 기복을 내려놓고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