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큐티가 어제로 마쳤습니다. 데오빌로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로 끝납니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마무리된 이유는 성령행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우리들 행전’을 써 내려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52편과 53편입니다. 52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 한 ‘한 사람’을 묵상하다가 오히려 혀로 지은 자기 죄가 보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깨달아져 아둘람 굴에서도 천국을 누린다고 노래합니다. 53편 또한 죄와 사망에 포로된 우리를 하나님이 돌이키실 때 구원받은 백성이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힘든 사람과 힘든 환경은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누리도록 수고하는 ‘공로자’이며, 고난을 통해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라는 제목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십니다.
52편의 표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말하던 때에.”
당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장인 사울에게 쫓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민족인 도엑까지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고발합니다. 사울에게 잘 보여 세상적 성공을 얻으려는 도엑의 이기적인 행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악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대적하려는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자존감입니다.
다윗은 도엑의 혀가 성공을 위해 아부하고, 자신에게는 날카로운 칼처럼 간사하게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선보다 악을, 의보다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셀라’하며 잠시 멈추어 묵상한 뒤, 혀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혀 역시 간사한 혀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걱정하는 척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혀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는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깨달은 내 죄와 수치를 고백할 때입니다.
이후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땅에서 심판받고 회개해야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장막에서 뽑히고 땅에서 뿌리를 빼는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말실수와 죄가 공동체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주의 인자와 자비가 평생 나를 따른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른다’는 사냥개가 사냥감을 추적하듯 불꽃같은 눈으로 쫓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될지라도,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해서라도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6절에 ‘의인’이 등장합니다.
의인의 특징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도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제사장들을 죽이는 데 앞장섭니다. 그래서 심판의 때에 의인들이 그를 비웃어 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역전되는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입니다.
악인의 특징은 GOD이 아니라 GOLD를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악으로 든든하게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굴속에 있는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의지할 것이 생기면 바로 요동치며 흔들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당한 고난을 내 이야기로 듣고, 나도 언제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도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사건을 통해 역전시키셔서 하나님을 붙들게 하시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셋째,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도엑과 사울이 여전히 다윗을 위협하지만, 다윗은 “그러나”의 인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둘람 굴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좋은 환경·나쁜 환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환경이 최고의 환경입니다.
다윗은 주의 이름이 선하시기에 성도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 고백합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였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공동체가 천국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저는 ‘학벌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편히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결혼 후 남편은 제가 수술하는 사이 직장을 그만두고 10년 가까이 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을 주시냐며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공동체로 인도되었고, 저의 죄패가 ‘하나님보다 한발 앞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에게 ‘한 방’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에게 뇌졸중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학원도 점점 어려워졌고, 제 열심이 얼마나 컸는지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많은 짐을 즐겁게 지는 척했지만, 작년 번아웃이 오면서 시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이 올라오고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2시간씩 남편을 운동시켜 주신 목자님, 문고리에 음식을 걸어 주신 집사님, 제 손을 붙잡아주던 공동체를 통해서 여기까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비합리적인 것임을 공동체에서 다시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비합리적입니다. 그 사랑을 받고 좋은 공동체를 만난 우리는 공동체에 잘 붙어가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푸른 감람나무처럼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며, 남은 성령의 행전을 함께 써 내려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