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족함의 아류를 조심하라
부족함에 머물러있는 사람은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갈릴리의 모든 사람이 배불렀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EO마다 수많은 병자가 몰려들었습니다. 그중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처럼 자신의 질병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부족한 모습 때문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부끄러움을 갖고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부족함은 예수님의 응답을 받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부족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10년간 목회하면서 성도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은사대로 섬기기와 1인 1사역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자녀들이게 저마다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저마다의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교회가 순기능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도 은사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기도, 상담, 심방에 은사가 있는 사람은 권사가 돼야 하고, 섬김과 행정 능력이 탁월한 사람은 장로가 되어 교회를 이끌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 주어지는 감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과 직책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세울 때, 교인이 된 지 몇 년 됐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많고 사람에게 칭찬받는, 은사적 기준으로 세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집사의 기준에 부합하는 은사를 가진 ‘Only one’을 뽑은 것입니다.
최고를 지향하는 교회였다면 최고의 몇 사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사대로 움직이는 ‘only one’이 움직이는 교회는 훨씬 더 역동적이고, 모든 성도가 살아 있는 사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쓴 <<주님의 나의 최고봉>> 이라는 책의 원제목은 “My utnost for His Highest”입니다. ‘최고의 하나님을 향한 나의 최선’ 이라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우리의 최고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the best one’ 이시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열정을 다하는 최선입니다. 최고가 되지 못했다고 좌절하고 머물러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손을 예수님은 반드시 잡아 주실 것입니다.
“3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 정호승 시인이 쓴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3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삼류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죠. 삼류는 3등의 아류입니다. 우리가 3등으로 사는 것은 괜찮지만, 삼류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장동건 주연의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빗대어 풍자한 <거지의 품격>이라는 개그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일명 ‘꽃거지’입니다. 허름한 코트를 열어젖히면 양쪽에 꽃이 가득합니다. 그가 어떻게 거지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거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면 3등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3등 인생인지는 몰라도 삼류 인생은아닙니다. 그의 삶 자체는 어#4356;#4448;#4523; 일류보다 나은 모습입니다. 거지임에도 가슴에는 꽃을 품고 살아가는, 일명 꽃거지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고, 자존감 또한 하늘을 찌르죠. 구걸해도 비굴하게 구하지 않고, “궁금하면 500원!”을 당당하게 외칩니다. 장동건 같은 1등이 일류로 사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지만, 꽃거지 같은 3등이 일류로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앞에 무릎꿇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대한민국의 교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대형 교회와 대형 교회가 되고 싶어하는 교회입니다. 모두 최고를 이향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작으면 스스로를 삼류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의 숫자가 적고 건물이 작아서 3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들이 삼류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거지도 일류로 살아갈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이 일류로 살지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삼류 갈릴리에서 일류로 사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남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나를 보면 겸손해지고, 남을 보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사셨고“ (전 3:11)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진달래 밑에서 철쭉이 몽우리를 터트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쭉은 자신이 받아야 할 찬사를 진달래가 받고 있다고 해서 실투심 #46468;문에 일찍 몽으리를 터트리지 않습니다. “나도 있다고요. 내가 더 아름답다니까요. 나 좀 보세요” 하며 때를 앞당겨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진달래가 받아야 할 찬사를 다 받을 때까지 자신의 때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때를 기다려서 몽우리를 터트리고, 냄새를 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고, 산속에서 언제나 다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산에 가는 길이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즐거운 것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성공을 위해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던 꽃이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고 내리막길을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그 꽃은 올라갈 때도 엄연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꽃향기는 고사하고 꽃을 볼 여유가 없이 살아갑니다.
삶의 현장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긴장하게 만듭니다.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긴장감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하지만 여행객은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누리고 음미하고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여행객에게는 모든 장면이 소중하고, 놓치기 아까운 순간입니다. 그리고 집착이 없습니다. 여행 자체가 주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 때 영원히 살아갈 주거민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을 어#4356;#4448;#4523;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걸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3)
느림과 나태함은 반드시 구분돼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림을 나태함의 결과라고 오해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반대의 생각에 있습니다. 느리게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태해서 느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태함은 느림의 아류입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 아닙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을 싫어합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거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르은 종아” (마 25:26)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살전 5:14)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꼼꼼하고 부지런하게, 사명을 다 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기다림이 아닙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린다. 천천히 간다”는 말로 포장한 나태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작지만 아름다울 줄 아는 여유와 크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순결함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다 작은 것만은 아닙니다. 작아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절대로 실패의 결과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각자 다르게 사용하시는 것뿐이죠.
셩경에는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눠 줬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한 달란트는 작은 재능, 닷섯 달란트는 큰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누가 재능이 더 뛰어난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입견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재능이 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재능이 작다고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재능이 크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를 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재능을 물려줍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유명한 유대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이 현금이나 땅 등의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재능을 물려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000년동안 그들은 늘 핍박을 받고 이곳저곳으로 쫓겨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돈을 모으고 땅을 사 놓는다고 해도 언제 다른 곳으로 쫓겨날지 모릅니다. 언제 은행에 있는 돈을 빼앗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과 현금을 그들의 재능 속에 담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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