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족함은 사명의 원동력이다
부족함은 사명감을 키우는 인큐베이터입니다. 처칠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노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실수는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말 잘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말을 잘 못하는 것이 모세 자신에게는 문제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죠. 프랜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의 말처럼, “하나님은 늘 거기에 계시고, 항상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방치하면 아픔이 되지만, 부족함에 사명을 담으면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패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의 경험이 성공을 위해 중요한교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실패와 성공에는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 자체가 주는 유익은 반드시 있습니다. 실패는 버려야할 과거의 아픈 추억이 아닙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지 않아도, 실패 그 자체의 경험이 인생에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저는 실기 시험을 위해 학원을 계속 다니고 있었죠. 필기시험에 7번 떨어지고 8번째 볼 때는 시골 시험장이 쉽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출장 가서 시험을 봤습니다. 영광스럽게도 80점 점수를 받고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날의 감격은 20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 창피하고 쓰라린 실패의 경험이 제게 안겨 준 유익은 무엇일까요? 바로 23년 무사고입니다. 7번 공부하느라 누구보다 교통법규를 잘 알게 됐고, 그 기간 동안 실기 연습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도 안전 운행은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말을 더듬는 부족함과 아픔이 탁월한 연설가의 밑거름이 되듯, 저의 연속적인 실패는 저를 모범 운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도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해서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가끔씩 신세 한탄만 할 뿐이었죠. 그런데 대학원을 마치기 전에 시작한 목회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목회 시작부터 지금까지 제가 성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형편을 너무 잘 알고 이해해 주세요.”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제가 직접 그들처럼 살아 봤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학 기간 동안 댈러스의 이민자들의 삶과 그들의 생업을 거의 모두 섭렵한 것입니다. 스렇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갈등과 힘든 점이 무엇인지 잘 알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핑계를 대는지, 진실을 말하는지까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겪은 모든 경험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사용하셨습니다. 가난과 부족함 때문에 겪은 수많은 경험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회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미리 나와 아내를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아픔은 사명입니다. 부족함은 그 자체로 사명이 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부족함 때문에 누군가에게 더 큰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나요? 예수님의 능력은 신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능력에서도 나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매료되는 이유는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이미 총리대신의 수업을 알뜰하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군대 장관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으면서 가정 총무가 되어, 애굽 국방부의 모든 시스템과 경영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와서는 당시 애굽의 내부부 장관에 해당하는 떡 맡은 관원장을 통해 애굽이 상대하는 이웃 나라들과의 외교에 대해 치밀하게 배웠습니다. 요셉은 노예와 죄수로 있으면서 국방, 내무, 외무에 대한 모든 것을 섭렵할 수 있는 최고의 과외 수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느 늦봄은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저는 깨진 항아리라서 힘들게 담은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 했습니다. “이 꽃길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만일 바울에게 그런 상처가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이 꽃길같은 사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픈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마지막 남은 손수건 한 장이라도 꺼내어 상처 위에 덮어 주는 그 진한 사랑의 마음도, 그 자신이 상처 입은 치유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공감대 넘치는 사랑 앞에 어느 병이 견딜 수 있었을까요? 상처가 없는 사람은 상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상처는 기적을 만드는 항아리였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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