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 본문은 히브리서 8장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모세가 그대로 모사한 방법대로 성소와
참 장막에서 그를 섬기고 있음을 히브리서의 기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재가가 되셨으니 이제 낡은 언약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제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과 그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는 내용(예레미야 31:33)을 히브리서의 기자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10절)
당신은 하나님의 법을 따릅니까 아니면 자신의 법을 따릅니까?
당신은 아직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행한 죄를 잊고 있습니까?
오늘 중요한 교칙을 어긴 세 명의 학생들에 대해서 전체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고등학교
조회를 소집했습니다. 또 다른 두 명의 학생들은 이 학생들이 교칙을 어기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하지 않도록 말리거나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학교와 학생들의 교내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는 저의 관점 역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언약과 법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행할 의지가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어느 편을 지지하는 것일까?
진실인 것, 선량한 것, 교양 있고 올곧은 것 아니면 그 반대의 것들?
정의의 중요함에 대해서 언급해 왔지만 정의는 자비와 만나 희석되는데 나를 포함해서 옳은 일만
할 수는 없는 우리 모두에게는 자비와 관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가장 잊히지 않는 기억은 중학교 시절의 일입니다.
이웃에 새로 한 아이가 이사를 왔는데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빠가 나의 아빠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아빠는 그 아이와 친구가 되어 주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애는 좀 어리숙 했고 우리는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공통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해서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 함께 등하교를 하면서 노력했습니다.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고 특정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그런 그룹의
아이들이 편협하고 냉소적이며 교만하고 건방지다고 생각해서 싫어했는데 사실은 내 안에
그들과 비슷한 성향과 기질의 태도가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친구가 되어준 그 친구는 재빠르게 나와 그 그룹 간에 적대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우리끼리 이야기 했던 것들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나를 당황하게 하거나 놀리곤 했습니다.
나를 놀린 것으로 그는 그 그룹에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그의 배신의 행동에 대한 나의
잊을 수 없는 증오가 생겨났습니다. 그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정말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고 속으로 나는 기뻤습니다.
그런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깨닫는 데는 제 인생 절반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나의 친구관계를 맺은 사람은 누구든지 마치 고귀한 축복이라도 받은 듯이 영원히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무엇 때문에 내가 그리도 특별하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나 아마도 정말 아마도 나는 나태한 길을 선택한 것이고 어쩌면 나를 배신한 그 친구가
더 생명력 넘치는 친구들을 찾아서 옳은 길을 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이 관용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 학생들에게 비록 그들이 심각하게 교칙을
위반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공감해 줄 것을 당부했고 우리들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악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적용: 우리 학교 중학생들에게 내일 고등학교에서 이번에 있었던 일과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을 돌리며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더 이상 저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