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일 토요일
요한복음 1:9-18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 다니엘도 몰랐다. 모세도 먼발치에서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 삼년의 결론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기대하며 기다렸던 시원한 답 하나를 말씀하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모든 수식어를 버리고 간결하게 말씀 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바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는 것이 되겠다. 이것이 은혜이다.
시온의 대로가 열렸다. 역설적으로 좁은 길이다.
다른 길은 없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단 하나의 길을 말씀하시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대략적으로 선을 행하고 죄악을 멀리하고자 노력하는 가상함은 있으나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확하게 ‘내가 곧 길이라’고 선언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님의 꽃의 전문이다.
그랬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절망이란 단어를 새기며 죽어갔을 존재들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꽃’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영접한다는 것이 바로 ‘의미’ 있는 만남의 시작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럼에도 그의 증거가 의미심장하다.
“요한이 그에게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을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1:15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의 증언이 일치한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가리켰다.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고 소개했다.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이다. 이것은 학습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으셨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였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였다.
영접하는 자의 대표자를 고르라면 삭개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주님께서 ‘삭개오야’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가슴에 맺혀있던 죄의 사슬이 풀어지자 토색한 것을 사배나 갚겠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절반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겠다고 하였다.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자발적 헌신이었다. 주님을 영접한 자의 삶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삭개오가 노래한 것은 자신이 가진 지위가 아니었다. 재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신 임마누엘 주님을 기뻐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번화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속박해왔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돈과 명예의 거추장스런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짜리’ 인생을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