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요한이서 1:1-6
“아쉬움”
사도요한은 무엇이 아쉬웠을까? 두 번째 편지를 쓰기 위해 또 붓을 들었다. 구십의 노인네가 못내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유언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총정리하면서 큰 글자로 써내려갔다.
‘사랑하자’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로 시작해서 인간관계를 통한 사랑을 말씀하셨다면, 사도요한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정의하신다.
오늘 수신인을 밝혔는데 먼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 다음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모든 세대를 향하신 부르심이었다. 따라서 이 부르심은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이미 그들은 초대교회를 체험한 자들이었다. 사도 요한은 적어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일관되게 외치고 있는 것은 ‘전도하자’ ‘기도하자’에 앞서 ‘사랑하자’였다.
모든 것이 막막한 시대였다.
밖으로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제사장 그룹에 의해서 진정한 예배가 실종된 채 형식만 남아있었다. 더 나아가 실권을 가진 이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교회를 핍박하였다.
안으로는 영지주의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는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였다. 안팎으로 위기였던 교회에게 필요한 처방은 사랑이었다.
부흥의 시대를 거쳐 성도의 증가세가 둔화되고 내리막길로 들어선 오늘 한국교회를 위기라고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풍요의 시대는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물질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이웃과 담을 쌓고, 핵가족이라는 이기적 시대가 되고 말았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삶의 질이 높아진 한국교회를 향해서 사도요한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또 다른 갈증에 목말라하는 오늘도 동일하게 ‘사랑하자’라고 외칠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이서 1:2-3
이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흐른다. 그 진리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다.
이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이 진리는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신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영접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바로 구원을 이루는 영원을 향한 첩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최종목적은 영원으로 향하는 문이다. 담대하게 좁은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