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요한일서 2:7-17
“사랑하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다. ‘우리’라는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단순한 나 하나의 생명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치유를 위한 일하심이었다.
사도 요한이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하라’는 요청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명령인 것이다. 바로 그 이유가 2절에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죄’를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절대로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단어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주님 앞에 부자 청년이 나왔다. 그의 질문은 고상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또는 먹을 것 때문에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루 한 끼 먹기도 바쁜 민초들의 삶과는 달랐다.
아마도 지금 주님께서 오셨다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는 먹는 문제는 해결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디를 취직할까? 어느 직장이 더 좋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 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년 그리고 노년을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배고픈 영혼들 중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부자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주님께 질문을 던진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요청하셨다. 네 가진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어야하는 동사임을 말씀하셨다. 오늘 그 사랑을 사도 요한이 요구하신다. 명령이다. ‘사랑하라’ 단순한 이 명령 안에는 수고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그것도 ‘언제나’라는 부사가 뒤따른다. 내가 사랑에 실패했던 첫대목이다.
야구에서 1번 타자가 서두르다가 삼진을 먹듯이 오래 참지를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성도의 걸어갈 길이 좁은 길, 사랑의 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부자 청년은 계명을 준수하였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것은 내 것을 기꺼이 나누는 일로부터 출발됨을 가르치신다.
구십 세 노인네가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였다. 자신의 삶을 총정리하면서 외치셨다.
‘사랑하라’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명령을 새김질한다. 교회 안뿐만 아니라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온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