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요한일서 1:5-10
“만일”
오늘 본문 단 여섯 절에 ‘만일’이라는 부사가 4번이나 사용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이 담겨져 있는 단어이다. 어느 누구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예외 없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사도요한은 교회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사귐으로 시작되어 누림으로 완성된다고 하셨다. 이 일을 위하여 붓을 들었다고 하셨다. 오늘은 사귐의 전제 조건이 바로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진리를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기독교는 이 땅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남으로서 시작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다.
기독교의 출발은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위에 세워진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첫 조건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세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주님을 비난하였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2-13
그렇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는 목욕탕인 것이다.
초신자였던 베드로는 위급한 순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열혈당원이었던 가롯 유다는 삼년동안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은 삼십에 팔기도 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좌의정 우의정을 탐하였던 자들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시정잡배만도 못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다.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세상을 향하여 나는 할 말이 있다.
그래! 당신들의 말이 맞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손가락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여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발견한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의 사랑에 목이 멘다.
오늘 네 번의 ‘만일’ 안에 감추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노래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6절
만일 죄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 8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깨끗하게 하신다. 9절
만일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