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티 본문은 출애굽기 8장 16-32절 말씀입니다.
바로는 개구리 떼의 재앙이 거두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제사 드리러 가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의 재앙을 더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마술사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말하지만 바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파리 떼의 재앙을 내리시지만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파리 떼가 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했지만 파리 떼가 물러가고 나자 다시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흘간의 광야로 가야 했을까요?
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었을까요?
“광야로의 사흘 길” (27절)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본래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더욱 힘들어 질 때도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의 힘든 일상은 훌륭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이 피가 되는 재앙과 개구리, 이 그리고 파리 떼의 재앙은 반응을 요구하고 있고
그 반응은 고통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어지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바로의 태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변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저는 딸이 한국에 와서 저와 함께 일 년 아니 반 년 만이라도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제가 왜 딸이 나에게 와서 함께 지내기를 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넘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딸과 저를 위해서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혼외 자식을 낳은 나의 죄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는 결국 3개월 동안 저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저에게로 왔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딸은 많은 좋은 면들과 또한 좋지 않은 습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나름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딸의 존재에 대한 나 자신의 인식과 감정의
재앙에 대한 것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딸을 양육하는 것을 돕지 못한 죄책감으로 나의 삶은 복잡해졌고 그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어색한 방법으로 그것을 행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오픈한 살면서
저지른 죄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한 것을 집사람과 딸아이에게 오픈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충격적인 깨달음과 이것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내 삶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저를 외롭게 만들었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번에 딸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내가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광야로의 사흘 길을 저는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삶의 죄와 실패, 파산, 죽음, 그리고 이혼의 재앙에도 아직도 내 생각으로 버티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으러 가야 함에도 그것을 원치 않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담임목사님은 금송아지 주위에 모여서 춤을 추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보고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던져서 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깨버려야만 할까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광야로 가기 위해서 저는 어떻게 그 문을 열어야 할까요?
적용: 나의 절름발이 죄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부르짖으며 부지런히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바로의 완악한 마음으로 살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더욱 깊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셔서 나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