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5일 화요일
이사야 29:9-14
“듣기는 들어도”
이렇게 허망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극을 말씀하시다. 그들은 겉으로는 멀쩡했다. 교회생활도 열심이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셨다. 그들의 사탕발림에 더 이상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고개를 돌리신 것이다.
유다는 절기 때마다 꼬박꼬박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입으로는 가까이했고 입술로는 공경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딴 데 가있었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보다 애굽을 더 의지했다. 말과 생각이 따로 놀았다. 이러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린 희생의 번제단을 버리시고, 도리어 예루살렘 거민들이 살육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단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신다.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이사야 29:2
거듭된 호소에도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들이 가져오는 무수한 제물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중심을 보고 계셨다. 말씀에 헐벗고 굶주린 심령들이었다. 교회 강단에서는 여전히 사랑을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지만 성도들의 삶은 도통 변하지 않았다.
3,000년 전 이사야가 외친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원하셨는데 우리들은 헌금을 드렸다.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은 언제 어디서든지 미디어를 통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손 안의 핸드폰에서도 말씀이 넘쳐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예전보다 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귀를 막고 눈을 닫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가져올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하셨다. 다윗은 상한심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51:17절
확장해서 묵상해 보면 '상한 심령'은 과거와 현재의 두 가지 시점을 품고 있다.
과거에 대해서는 '잘못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이요. 현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서진 낮은 마음' 이다.
사도바울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로 시작되는 로마서 12장의 외침은 바로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너희들이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너희들의 삶이 반드시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나의 몸이 구체적으로 움직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오늘 하루, 나의 몸을 드리는 참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