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8일 토요일
이사야 1:1-8
“절망의 땅에서 부르는 소망의 노래”
이사야서를 읽는 첫날, 배은망덕이란 말이 떠올랐다.
딸내미가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았다. 손주의 재롱을 보면서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쁨이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힘겨움에
“이렇게 키운 것을 이 녀석이 알까?”라는 나의 말에,
“커서 할머니 냄새 난다고 안하면 다행이지!” 자조 섞인 대답으로 돌아왔다.
대가족사회가 해체된 후, 주위에서 흔히 회자되는 씁쓸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꼭 그러셨다. 이사야를 통해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와 같이 표현하셨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 1:2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를 거치며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4대의 왕을 거치면서 그가 본 유다의 실상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패륜아’라는 말씀이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이사야서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셨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사야는 절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다는 자신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헐벗음을 알지 못했다. 나병환자처럼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여기에 절절한 슬픔이 있다.
당시는 솔로몬 이래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하던 때였다. 한마디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한 시대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헐벗음을 말씀하셨다. 상처투성이의 네 모습을 다시 보라고 촉구하고 계신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는 한탄에 가까운 바울의 고백을 사도행전 말미에 기록하고 있다. 로마로 압송된 후,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였을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다고 했다. 그때 이사야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을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사도행전을 마친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사도행전 28:26-27
한마디로 ‘눈뜬장님’이란 말이다. 환자가 자신의 몸의 상태를 모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분명히 중증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편에 서있는 내 자신을 본다. 이사야 시대를 넘어 바울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에도 동일한 잘못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사야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내 존재자체가 없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 갚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사야 1:9
오늘도 불충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나의 소망을 기대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