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일 월요일
사도행전 15:1-4
“성장통”
승승장구였다. 가는 곳마다 이적이 일어났고 말씀이 선포될 때 믿는 자들을 더하셨다. 그러나 그에 따른 반작용도 만만찮았다. 박해는 계속되었고 바울 자신도 돌에 맞아 거반 죽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그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 복음을 전했다. 이런 외부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대에서 올라온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원 받는데 있어서 믿음과 함께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다.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할례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쟁점화 된 것이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2절
부흥하던 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큰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갈등의 당사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안디옥교회의 전송을 받았다는 말은 기도하면서 보냈다는 말이다. 그들은 가는 길목에 있는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회를 들러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사실을 전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선교보고이다. 형제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고 흩어진 교회들이 더욱 든든히 세워졌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왜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 하나 되게 하신 걸까? 이런 논쟁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 이야기다. 여자 전도사는 윗 강단에 올라가지 못했다. 윗 강단은 목사들만 올라갔다. 신임 전도사가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기타를 쳤는데 담임목사로부터 꾸지람을 받았다. 불경건한 악기로 찬양하였다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 교회가 지금은 드럼까지 동원해 기도회를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큰 울타리를 만들어놓으신 다음 그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셨다. 율법의 수많은 규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셨다.
사랑하라고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영생에 대한 구도자였던 부자청년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 그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알았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부자인고로 근심하여 돌아갔다.
사랑은 동사란 말이 마음을 두드린다. 사랑은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이 가슴에 젖어드는 아침이다.
그들은 다툼 중에 그리고 변론 중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중에 교회를 돌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끊임없이 복음을 증거했다. 그들은 문제 앞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였고 쟁점들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거치는 사춘기라는 성장통이 있는 것처럼 건강한 교회란 갈등이 없는 교회가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라는 것으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