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8일 월요일
사도행전 11:1-18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삼세번
베드로에게 있어서 3이라는 숫자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주님을 향한 세 번의 부인을 치료하시기 위해 다시 고기잡이하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첫사랑의 추억을 통해 그를 부르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반복된 세 번의 질문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고치신다. 그리고 황홀 중에 맛본 세 번의 반복된 환상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숫자 또한 세 명이었다. 특별한 연관을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주님의 인도하심은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징크스였을 것이다.
순회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 할례파 기독교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의 지적 속에 담겨있는 외국인 혐오증은 그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자신들 역시 유대교라는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박해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들은 민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사도행전 11:1-3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에 정죄하고 비난하였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복음은 더 이상 한발 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배타적인 민족의식은 복음을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장벽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여리고성이었다. 성문을 굳게 닫고 버텼던 그 여리고성이었다. 한편 그들의 똬리를 틀고 있던 또 다른 확신은 할례와 함께 믿음이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류와 편견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갈등’이라는 소재를 통해 오히려 신학이 정립되는 계기로 삼으신다. 베드로는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간의 생각과 뿌리 깊은 전통에 앞서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도행전 11:17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편견 그리고 상식과 고정관념이 복음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본다. 일전에 읽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제목이 우리 삶에 근간이 되기를 바라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