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7일 목요일
사도행전 9:1-9
“어찌하여”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후, 아소도를 지나 가이사랴까지 지경을 넓혀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가이사랴 땅에 혈기방장한 한 젊은이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신념에 찬 이러한 행동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에도 당연하다고 믿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약 250km라고 한다. 적어도 이틀, 노새를 타고 이동할 시에는 닷새는 걸릴 거리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누가는 이런 사울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했는데 살기등등했다고 했다.
그 사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다. 강력함에 엎드러졌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 두 번이나 거듭해 부르셨다. 그만큼 긴박한 부르심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던 그 다급한 음성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예수와 하나 된 사람인 것이다.
로마서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로마서 8:9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이다. 내 몸과 마음에 좌정하셔서 나를 다스리신다. 나를 성전 삼으신 사건이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그 현장에 그와 함께 돌에 맞고 계셨다. 동일하게 그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의 현장에도 함께 계신다. 우리의 죄악의 창끝이 주님의 옆구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길우야! 길우야! 어찌하여 나를 찌르느냐?“
사울에게 외치신 주님의 음성이 오늘 내 가슴에 메아리로 다시 들려왔다.
일순간에 실명으로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은 고꾸라졌다. 살기등등한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같이 갔던 일행 또한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달려가던 한 인생이 갑자기 실명이란 암초에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좌절감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걸음을 멈추고 무릎 꿇었다. 복음은 ‘멈춤’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발상지 다메섹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을 향한 빛이 이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늘 내게 비추인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사울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