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8일 토요일
사도행전 4:13-22
“증인 된 삶”
누가는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나이를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고 기록했다. 기구한 한 인생의 세월을 함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의사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생존수단은 성전에서 구걸하는 일이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미문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 일행을 체포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늘 보아왔던 지체장애인의 회복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딜레마였다. 산헤드린 법정에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외쳤다. ‘그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행전 3:10
전전긍긍이란 말을 이럴 때 쓴다 하겠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기 어려웠다. 고육지책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제사장들의 협박에 대한 대답이었다.
흔히들 전도가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이제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단골 메뉴이다. 전도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게 하는 것은 나의 수완에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마땅히 본 바를 그리고 들은 바를 전하는 ‘증인된 삶’이기 때문이다. 열매를 거두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실패는 하나님을 보아야 할 눈으로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 것은 백성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사도행전 4:21
이 비참한 인생이 바로 내 자신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 모르고 죽어가는 인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이었다. 주권을 잃어버린 채,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유다 민족이었다.
한 인생을 얽어맸던 사슬이 풀리고 자유를 얻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서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마땅히 축하해주어야 할 치유의 사건을 은폐 혹은 축소하려고 했다.
기득권층이었다. 진실보다는 자기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가련한 인생들이었다. 사십여 년을 걷지 못했던 인생보다 더 불쌍한 자들이었다.
나는 오늘 갈래 길에 서있다. 이 질문을 가슴에 담고 하루를 시작한다.
예수 그 이름을 전하는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타협하며 여론에 편승해서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