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1일 토요일
사도행전 2:14-36
“누구든지”
오늘 등장하는 요엘서는 내게는 잊혀 진 책이었다. 성경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소선지서라고 했다. 내가 가진 성경으로 딱 한 장 반 분량이었다. 아마도 성경 중에 가장 짧지 않나 싶다.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 후, 오전 9시였다.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해명하면서 인용한 첫 번째 구약성경이었다.
요엘서를 읽었다.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메뚜기 떼와 황충에 의해 모든 먹을 것이 사라진, 기근의 땅에 내려진 묵시였다.
책망을 시작했다. 먼저 포도주에 취해있는 자들을 향해 깨어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울 것을 명령하셨다. 세상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깨우셨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들의 눈에는 성령강림 후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이 술이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너희들을 깨우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고 했다.
황폐한 땅이었다. 영적으로는 말씀이 말랐고 육적으로는 로마라는 메뚜기 떼에 먹을 것이 강탈되었다. 그 기근의 땅에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가 벳세대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어린 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배고프고 목마른 요엘의 시대였다.
하나님께서 목마른 땅을 방문하셨다.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나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만큼 어두운 땅이었다.
예수가 이방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신앙생활 잘 한다고 선생질하던 자들이 죽였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일어날 현재적 사건이다.
한국교회가 병들었다고 말들 한다. 예수로 포장된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잘 준비된 말씀이 선포되고 관객들이 열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 짜여 진 이벤트였다. 성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밥 먹듯이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요엘서에 말씀하신 절망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소망이 사라진 자들을 다시 부르신다.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이었다. 지지리도 못난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피할 길을 내신 것이다. 단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했다. 이것이 은혜이다.
내게 소망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복음의 출발이다. 주께만 소망이 있음을 아뢰는 것이 믿음이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이 사랑이다.
오늘 하루,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빌립보 감옥에 메아리쳤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을 외치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