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0일 화요일
여호수아 16:1-10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어제에 이어 지리 할 정도로 땅 분배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분배를 마칠 즈음에 후렴처럼 등장하는 말씀이 있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 여호수아 16:10
땅을 분배 받으면서 그들은 꿈을 꾸었다. 40년의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출발선에 선 설렘이 있었다.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풍성한 소출을 기대했다. 널 푸른 목초지를 보며 낙농을 꿈꾸었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민의 삶에 대한 기쁨이 제비를 뽑고 땅이 나누어질 때마다 충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잊어버린 것이다. 남겨진 이방인들을 종으로 삼은 것이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은 곧 재산이었고 부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이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사람 편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성공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절반의 성공이었다. 아니 99%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조금 부족한 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순종이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날, 폭포수 같은 기쁨이 내 삶에 충만하였다.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 모르고 죽어가는 인생들이 ‘쓰나미’처럼 휩쓸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신앙에 관록이 쌓여가면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웃성도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을 잣대 삼아 적어도 이 정도면 나는 괜찮은 성도라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 보편적인 사람의 생각에 맞추기 시작했다. 적당히 타협한 것이다.
그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해졌다. 독불장군 같은 외기러기처럼 살지 않아 잘 맞는 옷처럼 편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변질된 것이다.
진멸이란 단어는 ‘예외 없음’이란 말이다. 흔히들 ‘올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나의 편리를 위해서 예외조항을 추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전부를 주셨는데 우리는 일부만을 드리는 변질된 신앙인이 된 것이다.
사람의 생각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매력적일 수 있을 것이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중용’이란 말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한 때는 모든 종교가 똑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하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외 없음을 선언하신다. 진멸이란 단어를 마음에 새긴다. 아직도 쫓아내지 못한 세상을 향하여 소리 높여 외친다. 너희들은 끝장났다고! 세상과 짝하는 구습을 벗어버리고 진리 되신 주님만을 따라가기를 소망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