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5;22-35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 어제까지는 후자였지만 바울이 앞에도 쓰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실 사울의 등장부터 바울이름이 언제쯤 앞으로 나올까 주의하며 읽었습니다. 오늘 유다와 실라도 등장합니다. 금쪽같은 이름들이라 생각합니다.
이름은 나의 신분인데, 내가 나를 인정하는 위치나 역할이 아닌 공동체에서 인정해주는 위치나 역할이 있습니다. 그 위치가 진짜이고 그 자리에 순종해야 됩니다.
나는 부목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얼떨결에 되었고, 목자는 부담의 짐 지는 것이 싫었지만, 내심 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교만했었습니다. 무의식중에 속에서 목자보다 낫다고 판단하며 표현하지 않는 목자 무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나의 목자님들은 나의 그런 모습에 재수없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과대망상 속에서 위선을 떨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직분상승이나 인정받는 것을 보고 분했던 적도 한번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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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직분 받는 것이 오히려 두렵고 전혀 감투로 생각되지 않으며, 안되는 것에 평안하며 기쁘게까지 여겨집니다. 공동체에서 인정해주는 것이 진짜이고,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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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예루살렘 회의를 보고 ‘삼성처럼 회의하라’가 아니라 이들처럼 회의하고 결정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요즘 나에게 말로 약간 괴롭고 혼란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둘째 딸의 졸업식 참가여부인데, 가고 싶은 마음과 가지 말아야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이나 아버지로서의 역할만 생각하면 가는 것이 백번 옳지만, 구속사적인 판단이 안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라고 합니다. 2년전 큰 딸 졸업식에도 갔다가 허탕 쳤습니다. 장인 장례식에도 갔다가 애들 얼굴도 못보고 돌아왔습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흉흉한 소식들 뿐입니다.
1월부터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있는데 가고 싶지 않다로 기울었습니다. 7년간 못보던 얼굴인데, 졸업식에 잠깐 가서 얼굴 한번 보는 것이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애들엄마 보는 것과 그 친구도 같이 올텐데 마주치기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전에 점방 문닫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나에게 묻기도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상처를 두려워 말고 다녀오라는 처방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갔다오라는 처방도 맞지만, 나를 괴롭게 하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처방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오직 구속사의 가치관만이 요긴한 것이고 그 외의 짐들은 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스스로 삼가서 잘되는 결정, 평안함을 주는 결정을 원합니다. 후에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이번 결정에 위로를 받으며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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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자들과 남는 자들이 나옵니다. 구속사적인 사명에 따라 행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성경인물들 중에 바울을 특히 좋아합니다. 베냐민 지파인 것도 있지만, 한 두 줄로 설명할 수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자가 아닌, 지금 남아서 떠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뜻을 몰라 찾아 헤맵니다.
영적으로 둔해서 괴롭고 혼란스럽습니다.
용사하여주옵소서
내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Jesus Name Amen
적용> 두들기듯이 더 묻고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