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신명기 28:30-44
저주(2)
어제에 이어 불순종할 때 닥쳐올 불행에 대해서 긴 호흡으로 말씀하신다. 저주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이 아니었다. 어긋난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닥칠 필연적 운명이었다. 축복을 짧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저주페스티벌처럼 이어지는 긴 경고를 들으면서 섬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살았으나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파국이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다. 이 말씀을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감히 범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이런 말씀에 고개를 돌리기 십상이다. 눈앞에 아른 거리는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진 나의 옛사람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붙잡는다.
앞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저주의 지뢰밭에 갇혀, 걸음조차 떼기 어려운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너희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애당초 안 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셨다. 그들은 두려웠다.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 아무 말 없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짐승을 잡아야만 했다.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심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여자의 후손이셨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었다. 말씀대로 살아야함을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인생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뒷감당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셔야만 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예수께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율법을 배움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더러움과,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 참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 안에서 죄인이며,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다.
율법이 없다면 죄인임을 깨달을 수 없기에 율법을 몽학선생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께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천지가 창조가 되시기 전, 태초에 계신분이셨다.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오늘 우리는 저주의 말씀 가운데서 절망을 보았다면, 이제 말씀이신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발견해야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발견한 자들만이 십자가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이것이 은혜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것이 복음이다. 이제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말씀과 함께 살고 걸어가는 자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의 이름이 별처럼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이다. 주님의 食口(식구)가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