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4일 월요일
신명기 25:1-10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신명기는 한마디로 자질구레한 것까지 챙기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형제를 정죄할 때에도 40에 하나 감한 태장까지만 허락하셨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인간에 대한 존엄을 가르치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의 고난을 기억했다. 몇 번의 태장을 맞으면서도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숨이 떨어지는 그날까지 그는 노래했다. 주님을 높였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고린도후서 11:24
철저한 율법학자였던 그가 율법에 근거하여 태장을 맞았다는 사실이 오늘 눈물로 다가온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목숨을 걸고 높였던 하나님께서 오늘은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다. 일하는 짐승에게는 당연히 먹을 것을 풍성하게 허락하신다.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많이 서성거렸다. 하찮은 짐승에까지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은 역설적으로 들려온다. 내가 소에게까지 관심을 가진다면 너희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은 이와 같이 끝이 없으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듣는 모세의 설교는 너무도 실제적이고, 현장감 있는 말씀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이미 가나안에서의 장미 빛 삶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집 없는 설움을 맛본 가정이 수년간 근검절약을 통해서 새집을 구입하고 계약을 마친 후, 이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40년간의 반복된 생활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음식, 40년 동안 해어지지 않은 옷을 입었다. 동일한 주거조건에서 살았다. 평등한 세상이었지만 더 이상의 변화는 없는 삶이었다. 어쩌면 무미건조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세계가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이시다. 정처 없는 나그네 삶을 청산한다는 소식은 설렘을 넘어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땅이 생긴다고 했다.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야말로 기쁜 소식 중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땅도 죽음은 비켜갈 수 없었다. 인간사에 있어서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슬픈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수취수법제도를 말씀하신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형수가 동생 중에서 택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지금의 잣대로 본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여인의 삶을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배려이셨다. 쓰러져 가는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사 구석구석 안 미친 곳이 없으시다. 허투루 그냥 넘어가시는 법이 없으시다. 이처럼 세밀하시다. 그래서 머리털 세신 분이라고 하신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다. 복음송은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에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