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신명기 22:13-22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칠거지악 (七去之惡)
예전에,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던 일곱 가지 허물을 이르는 말이다. 시부모에게 불손함, 자식이 없음, 행실이 음탕함, 투기함, 몹쓸 병을 지님, 말이 지나치게 많음, 도둑질을 함 따위이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이 땅에 엄연히 현실이었던 단어였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인의 인권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여권이 신장된 현 시대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법이었다.
오늘 말씀은 4,000년 전 고대 근동지방을 배경으로 벌어진 가정사였다. 결혼 후, 아내의 부정을 핑계로 거짓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에 대한 판결을 법으로 정하셨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하나님께서 친정아버지의 심정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계신다. 속속들이 그리고 일일이 챙기신다. 나쁘게 말하면 참견이고 좋게 말하면 관심이라 하겠다.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처럼 세심하게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숟가락몽둥이 하나까지도 세시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모든 삶,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 것이다.
모든 죄의 결말은 죽음이었다. 냉혹한 판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키시고자 하셨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돌이킬 기회조차 없는 시간이 바로 심판이다. 그리고 심판은 미래에 벌어질 사건이 아니다. 구원과 함께 심판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로마서 3: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명령처럼 죄인에게 닥칠 심판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다.
죽음으로 죄를 물으셨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다. 십자가였다. 이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믿음이요 구원일 것이다. 광야에서 뱀이 들린 것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다. 이러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거짓으로 모함하는 일들에 대해서 엄격한 판결을 내리신다. 그것은 개인의 일이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악으로 본 것이다. 운명공동체였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진 죄악에 대해서 여러 번의 권면을 통해서도 듣지 않을 때는 내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고유한 권한인 치리이다.
현대교회의 도덕수준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치리의 약화 때문이라는 것에 모두들 동의 할 것이다.
가장 무서운 심판이 무관심이라고 한다. 치리를 등한시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 이제라도 나를 둘러싼 죄악에 대해 치리를 선포해야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살길이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심을 알리는 목소리가 될 것이다. 마땅히 죽어야할 자들이었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음을 잊지 않는다면, 무관심에서 깨어나 큰 목소리로 외쳐야한다.
“쳐 죽일지니라.”
나의 무능을 죽이고, 나의 허물을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나의 자아를 함께 못 박는 망치소리를 들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