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1-24)
어제 저녁 억지로 아내의 손에 이끌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올림픽공원을 돌며 운동을 했습니다. 간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가 ‘까닭없이(17)’ 오를리 없을테니... 운동을 쉬지 말라는 것이죠. ‘억지로’라도 하고 나면, 기분은 좋습니다.
산책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까닭 없이(17)’ 느끼는 인생의 진로, 신앙의 방향, 딸의 시험,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분별’의 대상이며, 이것은 ‘말씀’ 으로만 가능하다고 결론 내었습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11)’ ... 이런 일이 없도록... 말씀이 손에 항상 있어야 겠습니다.
그런데, ‘까닭없이(17)’ 당한 내 상처를 이야기하는 욥의 고백을 보면..
‘모든 것은 내 삶의 결론이다’ 라는, ‘우리들의 잠언’을 아직 잘 깨닫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까닭없이’ ....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2)’라는 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엘리바스나 빌닷의 ‘인과응보’적 고난의 해석이 우리들에게는 더 해석하기도 쉽고, 적용하기도 쉽고, 하나님 가까이 갈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우리 목장의 목원은 이 ‘까닭없이’ 징계하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믿을 수 없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를 했냐고? ... ‘까닭없이’ 사랑하는 예수님이라면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까닭없이’....
하지만, 세월호사건만 보아도...
까닭없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같이 죽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까닭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까닭’은 당연히 있는데...
우리가 단지 모를 뿐... 우리가 단지 해석을 못할 뿐.
그 까닭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안에...
결국 우리의 신앙은 그 ‘하나님의 까닭’을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바로 말씀으로 말입니다.
적용) 말씀묵상을 한시간 이상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