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엘리바스는 욥이 자식도, 재산도 다 잃고 심지어 자신의 건강까지 잃어가는 판국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한다’라고 말하며 심지어 자신도 그런 미련한 자의 집을 저주했었다고 이야기한다.
도무지 그의 말이 욥에게 위로인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엘리바스는 끊임없이 욥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찾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환난이 닥쳤을 때에 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겪어야 하는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이 죄에 대한 대가인지, 시험인지는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만 알고 계신 커리큘럼을 학습목표도 모른 채, 자연적이지만 구조화된 상황 속에서 배워간다. 그리고는 그 학습이 끝날 무렵 또는 끝나고 지나왔을 때, 아~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이것을 배워 왔구나라고 깨닫는다.
섣불리 우리가 우리에게 또는 타인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을 해석하며 책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를 얻기도 하지만, 믿음의 참된 동역자를 분별할 수도 있다.
욥이 풍요롭게 살 때부터 그의 친구였던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 소식을 듣고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왔다. 둘은 잘살 때에는 서로 아쉬울 것 없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을 것이다. 욥은 엘리바스가 신앙적으로 하는 말도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엘리바스를 자세히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하호호 잘살 때에는 너도 나도 분별이 어렵다.
나도 내 이면의 죄와 우리가족의 사건들을 숨기고 친구들과 잘사는 척, 괜찮은 척 지낼 때에는 그럭저럭 모두 잘 지냈는데, 이제 고난 속에 있다 보니 믿음의 한 언어를 쓸 수 있는 친구와 아닌 친구들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엘리바스는 ‘나 같으면 너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을 텐데...’라고 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의지 않는다고 보기에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엘리바스는 큰일과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초점을 두고, 의지하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이 세상 고난의 해결사인 하나님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데, 그래서 그 고난을 만드신 것인데, 우리가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란다면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기도만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일과 기이한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위로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이다.
‘이래서 고난 받는거야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해주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어야 하는데, 엘리바스는 욥을 더 괴롭게 하며 책망만 할 뿐이다.
참된 위로란 무엇일까. 내가 영적 침체가 오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너 죄지은 거 아냐? 다 잘될거야, 하나님이 다 해주실거야’ 이런 말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 속에서 다움이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선하신 일을 하실 것이라 믿어’ ‘하나님의 뜻이 너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 라는 말들이 내 상황의 100%옳음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주는 것으로 느껴져 큰 위로가 되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오늘 말씀에서 상황적 맥락 없이 엘리바스의 말만 떼어놓고 보면 틀린 말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다.
하나님을 여러 사례로 분석하고 연구해서 알아보았나.
과연 우리의 얄팍한 지식과 지혜로 연구하여서 그 크신 이와 그 뜻을 알 수가 있을까.
머리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데만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데만사람인 엘리바스가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의 지혜로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 엘리바스가 욥에게 전하는 것은 위로가 아닌 충고다.
그의 충고는 시기적절하지 않았다. 때로는 배가 고파 쓰러진 이에게 ‘하나님이 당신에게 뜻이 있어서 그런거다 하나님을 안 찾아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설사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렇게 말씀을 전해주는 것보다 따뜻한 밥이 먼저 일 때도 있어야 한다. 시기에 적절한 충고와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주어질 어떤 환난에도 옳은 것이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