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26장17-30절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안 아무개에게 가서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그의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노라고 하시는 뜻을 전하게 합니다.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그들 모두 자신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롯 유다가 자신은 아닐 것이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식탁으로 몸을 돌리셔서 이 빵은 나의
몸이며 이 포도주는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찬미한 후에
감람산에 오릅니다.
제자들 모두는 자신이 배신자가 될까봐 염려합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죄없음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들 마음속에는 죄 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배신의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신의 마음이 항상 제 마음속에서도 잠복해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경시하고 제 자신의 교만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반쪽짜리 진실을 말하거나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유다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 반면 그 혼자만이 예수님을 랍비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성안의 아무개에게 가서 그의 집을 사용할 것을
요청하라는 말씀에 따랐습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주님 그리고 메시아가 아닌 그저 선생님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주님이라는 호칭 대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신자가 될 것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배신자에 대한 증오는 우리 안에 매우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 우리는 종종 배신과 정의로운
행동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도둑질한 학생을 배신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한 연대감은 불문율과도 같습니다. 회사원이라면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임에도
식당이나 술집에서 다른 동료직원들을 지키기 위해 가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면서까지
술에 취한 사장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회는 그가 속한 조직의 부정부패를 고발한 내부 고발자를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배신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이 죄로 너무 더럽혀져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여 사용하셔서 죄악의 세상을 깨끗이
하려고 하신 걸까요?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풀리지 않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제 자신에 대한 배신입니다.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는 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충성된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저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항상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제 자신을
배신하게 됩니다.
제 마음속에 내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용서받을 만하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가 만들어 낸 타협안은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받아들이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제가 스스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손가락을 자신에게 향하여 비난하는 모양새입니다.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것이 제가 첫 번째 아내에게 했던 다중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녀의 알코올 중독임을 부정함으로써 저는 그녀가 계속 술을 마시도록 허용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알코올 남용을 부정함으로써 아이들을 그 피해로부터 방어해 주어야 할
아빠로써의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그녀의 영혼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육신을 위해서
그것도 마지막 한 달밖에는 돌보지 않음으로써 저는 그녀와의 결혼서약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혼외관계를 가짐으로써 저는 하나님과 그녀와의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비록 나의 그러한 부정들과 직면하게 되었을 때 커다란 수치를 느꼈지만 그러한 행동들이
나의 죄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 번 내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너무 깊은 감사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제 자신을 계속해서 배신했습니다.
나의 일중독과 완벽주의는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배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일들을 함으로써 그것도 매우 잘 함으로써 저는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만하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면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복잡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결코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자신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제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제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의 놀라우신 용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용서를 구하며 또한 그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당신과 제 자신을 배신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항상 당신의 사랑이 제 마음에 넘쳐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