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유
믿음이 은혜의 통로로 선택되는 이유는 수용자로서 아주 적절하기 때문이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금을 준다고 해 보자.
돈을 줄 때 어디에다 놓는가?
그의 손에 쥐어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그의 귀에 놓는다든가 그의 발에 놓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손이란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신 구조 속에서도 믿음이란 수용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믿는 사람의 손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일은 잘 어울리는 일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은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주는 사과를 받는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한 행동이다.
당신은 사과를 보관했다가 아이가 달라고 하면 주겠다고 약속한다.
신앙과 받아들이는 일을 고작 사과와 관련하여 말했지만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이와 같이 유사한 행동이다.
어린아이의 손이 사과를 받는 것과 당신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손이 사과를 만든다든지 개량한다든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취할 뿐이다.
이와 같이 믿음도 구원을 창조하든지 구원을 돕는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기능으로 믿음을 선택하신 것이므로 믿음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만으로 족한 것이다.
믿음은 용서를 간구하는 혀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손이요, 그것을 보는 눈이지, 그것을 사는 돈은 아니다.
믿음은 결코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믿음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피에 의존한다.
믿음은 우리 영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가져오는 종노릇을 한다.
믿음만이 그 풍요함을 어디로부터 가져오는지 알고 있으며 은혜는 믿음에게만 그 풍요함을 맡기기 때문이다.
믿음이 선택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자랑치 못하게 하는 것은 은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을 그대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아시고 멀리하시며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식으로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
바울은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식으로 구원을 주지 않는다.
바울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했다.
믿음은 모든 자랑을 배제한다.
구제금을 받는 손이 “내가 선물을 받으니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손이 입에 빵을 가져다주고서 몸에게 “내가 너를 먹이니 내게 감사하라”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손이 하는 일은 아주 필수적인 일이긴 하지만 아주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은 자기가 하는 일로 인해 결코 영광을 독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을 받도록 믿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스스로 어떤 공로를 내세울 수 없고 모든 선물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한다.
믿음은 의로운 사람에게 면류관을 씌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5:34)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사람에게 면류관을 씌우셨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통로로서 믿음을 택하신 것은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사이에는 결합점이 있으며 그 결합은 축복을 보증한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여 하나님과 연결되게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예를 자주 사용해 왔으나 나로서는 그 이상의 예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신 반복하여 말하고자 한다.
몇 년 전에 보트 하난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뒤집어져서 두 사람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그때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간신히 그들에게 밧줄을 던질 수 있었다.
그것을 두 사람이 다 잡기는 잡았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재빨리 밧줄을 잡아 무사히 둑으로 올라왔고 다른 한 사람은 마침 곁에 떠내려 오는 통나무를 보고 밧줄을 버리고 그 통나무를 붙잡았다.
그것이 더 커서 매달리기에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뿔싸! 그 사람이 매달려 있던 통나무는 그와 함께 폭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왜냐하면 통나무는 강변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붙잡고 있던 통나무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 통나무는 안존을 줄 수 있는 강변과의 연결이 필요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성례와 같은 것을 신뢰한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비록 가느다란 끈과 같이 보일지라도 강변에 있는 크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 연결하는 끈에는 무한한 힘이 있으므로 사람을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오! 복된 믿음이여!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 주는 도다!
믿음이 선택된 또 하나의 이유는 믿음은 행위의 동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그 뿌리에는 어떤 믿음이 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일지라도 믿음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틀린 것일까?
내가 나의 서재로 걸어가는 것은 내 발이 나를 서재까지 운반해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먹는 것은 음식이 필요함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것은 돈이 가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수표를 받는 것은 은행이 수료를 신용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것은 돈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수표를 받는 것은 은행이 수표를 신용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것은 대양 너머 다른 대륙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그 대륙을 식민지로 개척했던 것은 바위가 많은 해안에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위대한 역사가 믿음에서 나왔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 안에 믿음이 있는 사람에 의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은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이다.
이 힘은 인간의 모든 행동 속으로 들어온다.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은 악한 형태이지만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믿음을 창조하심으로 우리의 감정과 행동의 가장 깊은 동기에 접촉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배터리를 소유하심으로 우리의 몸 모든 곳에 거룩한 생각을 보내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을 때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고 회개, 거룩, 열심, 기도, 성화와 같은 여러 가지 은혜로운 것들을 사모하게 된다.
바퀴와 기름의 관계, 시계와 추의 관계, 새와 날개의 관계, 배와 돛의 관계가 바로 믿음과 거룩한 의무들의 관계이다.
먼저 믿음을 거지라.
그러면 다른 모든 은혜가 자연히 뒤따를 것이요, 그 은혜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에 영향을 주며 사람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하나님께 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믿음은 이해의 행위이지만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이유는 믿음이 사랑과 가장 가까운 거룩한 감정과 행위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그것들을 길러 준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곡 순종이며 거룩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평화와 기쁨을 창조한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인식을 느리며 평화롭고 기쁘고 즐겁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늘나라의 은사들을 믿음에 두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더 좋은 천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나타나야 할 영적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갑옷을 공급하고 장차 올 생을 위한 훈련을 제공한다.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두려움 없이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행동하고 고난 받을 준비를 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 믿음을 택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안전히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
확실히 믿음은 다른 어떤 것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고 우리들을 안식에 이르게 한다.
왜 사람들은 다른 수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가?
나이 많은 성직자 한분 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어리석은 하인 한 사람이 문을 열라는 명령을 받고 그 문에 어깨를 대고 온 힘을 다해 밀었다.
그러나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열쇠를 가져다가 쉽게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사람과 같다.
그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믿음이란 단번에 하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독자여, 당신은 이 열쇠를 사용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믿으라고 명령하신다.
당신을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살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가?
마가복음 16:16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에 모든 것을 맡기는 구원의 길을 왜 거절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