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6일 월요일
신명기 9:7-21
“자기를 위하여”
우상숭배를 한 마디로 줄이라면 ‘자기를 위하여’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가 사십 밤낮을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때, 호렙산 밑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들을 인도해냈던 모세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모세의 형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부패하였다.’고 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 것이라고 하셨다.
우상을 세우는 목적이 신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신을 부르지만 그 목적은 자신들을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신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종교라고 이름 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럴듯한 것에 빠지는 것을 착각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았을 때 행복했다. 그들의 삶은 창조적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대로 모든 만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들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성도의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먼저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위하여 사는 쩨쩨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너희가 내가 맡긴 일을 할 때, 네 월급은 내가 책임지시겠다고 하셨다.
너희는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내가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짜로 정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그것을 믿고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리라고 확신한다.
그 자긍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아야한다. 세상에 눌려 주눅 든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는 태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인생들이 목말라하며 그토록 애쓰며 찾고 있는 것들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들에게 그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금송아지를 불사르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수고 찧어서 가루를 만드셨다. 그리고 시냇물에 흘려보내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신다. 그들의 눈앞에서 우상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는 것에 익숙하고 웅장하거나 화려한 곳에 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종교가 보는 것에 주목한다면 기독교는 듣는 종교이다. 오늘도 귀를 열어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담는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여담입니다만
흔히들 배경이 든든한 사람들을 ‘빽’이 좋다고 한다. 청와대 비서관의 이름을 사칭해서 대기업에 임원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박대통령을 20년 가까이 모셨다는 아무개 비서관이라며 모 건설사에 전화를 해서 내가 잘 아는 아무개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대기업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채용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잘 나간다는 청와대 배경을 가지고도 이처럼 끔벅하고 고개를 숙인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배경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